풍경 소리

 

          

                                                                                            朴籌丙

 

불이 마른 데로 나아가는 것이나 물이 습기를 따라 흐르는 것이 만고에 다르지 아니하듯, 학자나 문인이 서로를 좇아 어울리는 것 또한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정약용(丁若鏞)이 살았던 시대에도 그러 했던 모양이어서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시인들의 모임을 그의 글에서 만나게 된다.

젊은날 정약용이 주축이 되어 이 ‘죽란시사’라는 모임을 만들 당시에 그의 집은 명례방(明禮坊 -금의 명동)에 있었는데 이곳은 고관대작들의 집이 많아서 수레바퀴 소리, 말발굽 소리가 날마다 시끄러웠고, 아침 저녁으로 완상할 만한 연못이나 정원도 없었던 모양이다.

도연명 같으면 “마음이 머니 땅이 저절로 외지구나(心遠地自偏)”라고 읊조렸을 테지만 이때의 정약용은 아직 마음이 그냥 멀어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마침내 집 뜨락의 반 가량을 할애하여 화단을 만들었는데 화단이라지만 땅을 파헤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꽃들과 좋은 과일나무를 분에 심어서 벌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록을 보면 석류, 매화, 치자나무, 산다(山茶), 금잔화, 은대화, 파초, 벽오동, 만향, 부용 등인데 품종과 수효까지 적어 놓고 있다.

그냥 화분을 벌여놓았으니 여기를 다니는 비복(婢僕)들이 꽃을 스칠까 걱정이 되어 난간을 만들었다. 서까래처럼 굵은 대나무로 화단의 동북쪽을 가로질러 난간을 세운 것이다. 이 난간을 그는 ‘죽란(竹欄)’이라 했다.1)

‘죽란’을 만들 이때는 그가 귀양가기 전으로 호강스러운 시절이었다. 재주와 학문이 발군한 데다가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고 눈썹을 치키며 활개를 치던 무렵이었다.

언제나 조회(朝會)에서 물러나와서는 건(巾)을 젖혀 쓰고 이 ‘죽란’을 거닐기도 하고, 달 아래 술을 마시고 시를 짓기도 했다. 고요한 산림과 원포(園圃)의 정취가 돌고 수레바퀴 소리며 말발굽 소리를 잊을 수가 있었다.

‘죽란’의 꽃과 나무로 하여 마음이 멀기는 도연명과 다르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술이 있고 달이 있고 ‘죽란’의 꽃과 나무가 있고 그 벗들이 있어서 땅이 저절로 외지게 된 것이다.

‘죽란시사’라는 명칭은 그 모임이 흔히 ‘죽란’이 있는 정약용의 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연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 안주, 붓, 벼루 등을 갖추어 술 마시며 시를 읊는다. 나이가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마련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고, 한 차례 돌고 나면 다시 그렇게 한다. 또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품계가 승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에 급제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마련하는 모임이든 정기적인 모임이든 이 ‘죽란시사’는 시인의 모임이기 전에 젊은 문신들의 모임이었다.

15명 동인 가운데 정약용을 비롯한 6명이 정조 임금이 뽑은 초계문신(抄啓文臣)2)이었다고 하니 이 모임의 성격이 얼마나 귀족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래서일까마는 일진광풍에 ‘죽란’의 아리따운 꽃들이 덧없이 흩어지고 그들의 언약은 사랑처럼 허망했다. 정약용 형제가 귀양을 떠나던 날 ‘죽란시사’의 남은 사람들은 약조에는 없지만 어디에선가 은밀하게 모이기라도 했는지, 떠나는 길목 어디에서 바라보기나 했는지, 그런 소문이라도 누가 듣기나 했는지 그때를 생각하자니 공연히 화가 난다.

이제 나는 젊기를 하나, 멋이 있기를 하나, 글을 알기나 하나, 더욱 세상을 근심하는 마음 같은 걸 ‘죽란’의 사람들처럼 헤아려 볼 줄이나 아나, 그나마 먹던 술도 못 먹으니……. ‘죽란시사’라, 별것이 다 부러워지는구나.

부러워서였을까마는 나의 집이 꽃과 나무가 뜰을 채운 것은 얼추 ‘죽란’을 닮았다. 바람 소리 들으려고 대나무를 심었던가. 까치를 기다리려고 감나무를 심었던가. 일사(逸士)를 사모하여 매화를 심었던가. 그 따위 담장 밖 수레바퀴 소리 때문에 꽃과 나무를 심었을까마는, 마음이 떠나려 하지 않아 땅이 외지지도 못하고 마음이 ‘죽란’에 빠지지도 않아 수레바퀴 소리를 막지 못한다.

못 막은들 어떤가. 매화꽃 그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고 댓잎을 스치며 거닐어도 본다. 동녘에 달 떠오를 적에 마당의 나뭇가지가 슬며시 서쪽 담장에 걸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가만히 벌레 소리를 듣다가 아득히 지난날을 떠올린다.

꽃다운 시절, 꺾어진 꿈, 애틋한 인연, 어느 것 하나 뉘우쳐지지 않는 것이 없고, 앞을 내다보면 남은 일들은 대체로 뻔하다. 구차하구나, “경학 선생도 늙어지면 모두 좌선을 한다(經師晩年皆作禪)”라는 말이 왜 이리도 생각날까. 깨달음을 이루어 마음이 편안해지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런 것은 나의 분복이 아닌 줄을 안다.

어디로 도망을 치겠는가.

바람 따라 피었다가 바람 따라 지고 마는 한 송이 꽃처럼 나 또한 그렇게, 한 번은 열였다가 한 번은 닫혔다가 하는 조화에 맡겨 마침내 돌아가면 되는 것인데…….

처마 끝에 달아 둔 풍경이 바람에 운다.

“댕그랑, 댕그랑…….”

어쩌자고 풍경은 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박주병

철학박사. 한국주역학회 회원.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및 환경대학원, 대구 가톨릭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