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이유

 

                                                                                                                                                                                                            정영숙

 

여섯 살 터울인 언니가 있다. 나와는 달리 미인이다. 외양만 출중한 게 아니라 성격과 재능과 소질도 판이하다. 맑고 섬세해서 정적인가 하면 결딴날지언정 결코 굽히지 않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이른바 천재의 전형을 두루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우는 모자란 바보의 전형만을 고루 지녔다.

그러나 모자란 나름대로 초연할 리는 없었다. 잘난 형이 늘 미웠다. 안보면 견딜 만해도 마주 하면 배가 아팠다. 누구도 눈에 띄게 차별을 하는 건 아닌데 차별 않는 것조차 눈가림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그만큼 스스로를 홀대하였고 칭찬이 달갑지 않았으며 차라리 꾸중을 들으면 편했다.

유년의 어느 날 외사촌 오빠가 다니러 왔다. 날더러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했다. 식구 중 아무와도 닮지 않았다며 쐐기까지 박았지만 대들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게다. 그냥 울었다. 그 자리에서 목을 놓았고, 어딘가에 숨어서도 며칠은 더 울었는데 외가로 돌아간 오빠를 다시 불러와서야 울음을 그쳤다. 장난이 심했다면서 가래엿을 듬뿍 사주며 싹싹 빌고 간 게 대여섯 살 무렵이다.

어릴 때 언니를 데리고 닷새 장을 가면 사람들은 걸음을 멈췄다고 한다. 예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간혹 듣는 말이 ‘부잣집 맏 며느리’였다. 허나 그게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때만 하여도 우열을 가름하는 기준이 어느 쪽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나는 어떤 아이에게든 금기시하는 말이 ‘부잣집 맏며느리’였다. 이는 덕담도 아닌, 그렇다고 위안도 아닌 일종의 등외품을 싸잡아 이르는 말 같아서 이 불특정한 통용어가 나는 아직도 맘에 안 든다.

조물주만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부당한 정황들이 커가면서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외출에서 늦거나 더러 친구네서 외박을 하여도 그게 나일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니의 귀가가 늦는 날이면 삼이웃이 시끄러웠다. 반편 머슴까지 동원되어 온 가족이 지등 하나씩을 밝혀들고 언니를 찾아나서는 거였다.

그럴 때 나는 황당한 상상을 했었다. 50년대 후반, 빨치산이 출몰하던 산골이었다. 만약 한밤중에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 양식 보급품이 아닌 사람 하나를 원했다면 아마 우리 집 식구들은 분명 나를 취택해 공출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선 얼마나 두고두고 섧었던지.  

형만 못한 아우는 때없이 외로웠다. 같은 살과 피를 나누었건만 같지 아니한 비애가 내 삶의 절반을 지배했다. 열등감이란 비감의 습관이 굳어진 종양 같은 것이다. 굳이 내 언니가 아니어도 세상의 잘난 사람만 만나면 내 습관이 나를 주워온 ‘다리 밑 아이’로 세워놓곤 하였다. 성장기의 정신적 환경이 정서의 원형질이 된다고 볼 때, 부모의 어떤 배려도 작용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이다.

초등학교 이학년 무렵 읍(邑)에서 군(君) 단위 학교로 전학을 했었고, 나는 낯가림이 몹시 심했다. 반 아이들과 어울려 줄넘기놀이를 하면 단 한 번도 그 줄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순서를 기다리며 둘러선 친구들의 구령에 맞춰 양쪽에서 돌리는 줄 속을 뛰어들어야 하는데 번번이 발이 땅에 접착되어선 떨어지지 않았다. 낭패스럽고 무참하여 머릿속까지 화끈거리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한 번 ‘다리 밑 아이’가 되는 것이다.

요즘도 가끔 줄넘기 꿈을 꾸곤 하는데 꿈에서도 여전히 친구들의 왁자한 구령 소리가 들리고, 여전히 발이 땅에 붙박인 채 허둥대다 깨고는 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시효가 지났을 법도 한데 유독 이 기억 하나만은 소급이 안 되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주워온 아이가 아니었음을 익히 알고, 진실로 무엇이 예쁘고 미운 것인가도 안다. 머리로는 알지만 나의 두 발은 아직도 번번이 정지 신호에 걸린 채 줄넘기놀이 앞에 서 있는 아홉 살 아이 같다.

삶이란 어쩌면 줄넘기놀이의 원형 구장인지도 모른다. 어디 외출할 일이 생기면 미리 가슴이 답답하다. 길눈이 어둔 탓이다. 남의 집은 고사하고 내 집마저 제대로 못 찾아 길에서 운 적도 있다. 내가 본 서울특별시의 지도(地圖)는 누군가 마구잡이로 헝클어놓은 실타래에 불과하다. 아무리 간단한 그림일지라도 그것이 다름 아닌 약도일 때는 판독이 어려운 비밀 기호일 뿐 길이 되어주지 않는다.

지난 해 5월 남도 전역을 다녀왔다. 달랑 지도 한 장만 지니고 해남을 거쳐 땅끝 마을까지 찾아가는 남편의 눈썰미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던지. 입 밖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처음으로 나는 그를 천재라 생각했다.

내게 있어 세상의 모든 길은 아득한 신대륙이고, 나의 길눈은 아홉 살 이전에 퇴화하기 시작했다.

 

 

 

정영숙

<수필문학>으로 등단(89년). 문예지 <문학마을> 편집위원.

저서 『내 영혼의 오두막』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