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

  

                                                                             

                                                                                              김태길

  충주에 있던 유일한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내 나이 열 살 때였다. 탄금대(彈琴臺)에서 가까운 외가에 신세를 지면서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굵은 자갈이 깔린 신작로를 고무신 신고 걸었다.

등교와 하교길 중간 지점에 봉방교(鳳方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넓이는 3~4미터쯤 되고, 길이는 20미터 남짓한 작은 다리였다. 높이는 3미터쯤 되었을까. 다리에 난간은 없었다.

초겨울로 기억되는 어느 날 하교길에 그 다리까지 왔을 때, 아주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눈을 감고 이 다리를 끝까지 건너가면 나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고, 중간에 겁을 먹고 눈을 뜨거나 다리 밑으로 떨어지면 보잘것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운명에 대하여 모종의 믿음을 가졌던 나는 눈을 감고 앞을 향하여 용감하게 걸었다. 한참 걸어갔을 때 ‘아찔한’ 의식이 번개처럼 지나갔고, 나는 물이 없는 개울바닥 돌부리에 머리를 박고 꽝 떨어졌다. 피가 흐르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동행하다가 돌발 사고에 놀란 상급반 형들이 나를 들쳐업고 다리 위에까지 올라왔을 때, 마침 지나가던 외재종(外再從)형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나를 읍내 충일의원으로 데리고 가서 바로 수술을 받도록 조처했다. 그날 저녁은 병원에서 잤고, 다음 날 난생 처음으로 일본식 우동을 맛있게 먹었다.

통원 치료를 하게 되면서부터 학교에도 나갔다. 머리통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꼴로 교정에 들어섰을 때, 여학생들이 놀라움 같기도 하고 호기심 같기도 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서 우리 반의 똘똘이 이대영(李大榮)의 누나이기도 한 5학년 여자반 반장은 “어마나 쟤가 어쩐 일이지?” 하며 크게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학교 여자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나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다소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 아름다운 누나의 따뜻한 시선을 지금도 아련하게 기억한다.

 

‘남녀 공학’이라는 것은 말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시절이었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도 여학생반을 뽑기는 했으나, 교실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쪽 동네 사정은 거의 모르고 지냈다. 우리가 4학년쯤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존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색시 티가 나면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학년 여학생 가운데서 관심을 끈 것은 오직 소수에 불과했다.

임 아무개는 덩치가 크고 달리기를 잘했으므로 화제에 올랐고, 정 아무개는 ‘끼가 철철 흐른다’고 해서 악동들의 시선을 끌었다. 다만 나의 은근한 관심은 김지수라는 여학생 위에 머물렀다. 매년 줄곧 반장 노릇을 한 재원 정도로만 알고 있던 그가 내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은 것은 5학년 때 우리 반 담임을 맡았던 마에다(前田) 선생이 수업 시간에 ‘김지수’를 입에 올린 때부터였다.

5학년 여자반 담임 선생에게 사정이 생겨서 며칠 결근을 하게 되었을 때, 마에다 선생이 대신하여 그 반 수업을 맡은 일이 있었다. 그 대리 수업이 있은 다음에 마에다 선생은 김지수의 우수성을 극구 찬양하면서, “너희들 가운데서도 그런 학생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나는 김지수에게 시샘을 느끼기보다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 앞섰다.

‘남녀 유별’의 관념이 충만했던 충청도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 친척도 아닌 여자아이와 ‘아는 사이’가 되는 길을 스스로 개척할 능력은 없었다. 그저 막연한 동경(憧憬) 비슷한 심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겼다. <문>이라는 제호의 교지(校誌)를 창간하게 되었고, 김지수와 내가 그 위원 7명 가운데 포함되었던 것이다. 어린이 소꿉질 수준의 잡지를 학생들의 힘으로 만든다는 것이니, 그 위원들은 자연히 ‘아는 사이’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당시 충주보통학교에는 졸업 후에 진학할 수 있는 2년제 ‘고등과’가 있었다. 그 고등과 학생들 가운데서 위원장이 나오고, 그 밑에 6학년과 5학년 학생 각각 세 사람이 위원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위원장을 맡은 고등과 학생은 조용준이었고, 6학년 여학생 위원의 이름은 홍윤희였다.

홍윤희는 재원으로서의 명성이 전교에 알려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역시 반장이었고 특히 빼어난 미모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내 주위에 ‘아는 사이’로 다가가고 싶은 여학생이 두 사람 나타난 셈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아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 기회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위원장을 맡은 조용준이가 한수 위였던 것이다.

‘학예부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가끔 모이기는 했으나 어떤 의제(議題)를 내놓고 회의다운 회의를 진행하지는 않았다. 위원장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했으며, 여섯 명의 위원은 한갓 보조원으로서 대접하였다. 쉽게 말하면 졸병을 거느린 장교처럼 군림함으로써, 두 여학생과의 대화 기회는 오직 위원장만의 전유물이 되고 마는 절묘한 상황이었다.

함구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대화의 기회를 만들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모임 장소로 가는 길목에서 서성거리다가 여학생과 우연처럼 마주치면, “학예부 위원회에 나오는 길입니까?” 하고 말을 걸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따위 바보 같은 수작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러 용기를 내어 무엇인가 물어본 적이 한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예’, ‘아니오’ 또는 ‘모릅니다’로 끝나고 마는 수줍은 대화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나는 담임 선생의 지시를 받고 무슨 도표를 그리게 되었다. 추운 겨울날이었으므로 담임 선생은 온돌방으로 된 숙직실에서 작업하도록 배려하였다. 해질 무렵까지 걸려서 도표를 거의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렀을 때, “아이 추워” 하며 여학생 두 사람이 숙직실로 들어왔다. 홍윤희와 김지수였다. 나는 그저 꿈을 꾸는 기분이었고, 벌떡 일어나서 어떤 말을 걸 정도의 기지나 여유는 없었다. 아마 일어나 앉아서 목례(目禮) 정도로 아는 척한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두 여학생은 선 자세로 내 작업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홍윤희가 말한 한 마디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어쩌면 도표를 저렇게 잘 그렸지?” 그러나 나는 그림 솜씨가 좋은 어린이는 아니었다.

 

교지 <문>은 창간호만 냈을 뿐 계속 나오지는 않았다. ‘학예부 위원회’도 자연히 흐지부지 없어졌고, 행여나 ‘아는 사이’가 되기를 바랐던 두 여학생의 모습도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