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이터

 

                                                                                                   유혜자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우리 나라의 나이든 주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아프리카 비경을 배경으로 인텔리 여성과 자유로운 영혼의 남성이 벌이는 멋진 로맨스, 특히 강가에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에 감동들을 했다. 여주인공 카렌이 잘된 운율의 얘기를 풀어가서 남주인공 데니스를 감탄시키는 재능과 품위도 부러워하고.

내 경우는 이런 로맨스보다도 영화의 첫머리 황혼 장면에 깔리던 여주인공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의 여성작가 아이작 디네센의 자전적인 얘기로, 나이 든 주인공이 온갖 감정이 응축된 목소리로 “그 사람은 사파리에 축음기까지 가지고 왔지. 우리들의 우정은 선물로 시작되었어…”라고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목소리에는 사파리의 애틋한 경험과 끓어 넘치던 격정에서 해방된 허전한 아픔이 녹아 있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경우엔 여주인공 역의 메릴 스트립이 해설을 맡았으나 유명 영화에서는 드라마와 관계없는 명배우를 해설자로 써서 극의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영화 ‘연인’의 경우 프랑스의 원로 명배우 잔느 모로가 해설을 맡았었고, 월트 디즈니 사의 어린이 영화에서 로빈 윌리암스는 명 해설로 인기를 얻은 배우이다.

알려진 대로 내레이터는 영화, 연극, 방송극에서 스토리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동작만 있고 대사가 없는 다큐멘터리에서는 해설로 스토리를 진행해 준다. 가이드 역할과 스토리를 응축시켜서 전개하는 드라마 토막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도 하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내레이터를 부러워했다. 주인공들이 나눈 대사 내용이 모호하게 여겨졌을 때 “그때 그는 웃으며 말을 했지만 속마음은 울고 있었다…” 혹은 “그는 양심과 욕심이라는 두 갈래에서 갈등하고 있다”라는 둥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려주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짤막한 한 마디로 긴박감을 높이는 재주도 부렸다. 나는 내레이터가 말하는 내용은 작가가 써주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내레이터가 순간적으로 꾸며서 하는 줄 알고 신통하게만 여기고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레이터의 역할이 작가의 대본에 의한 것인 줄 안 후에도 나의 내레이터 흠모는 변하기 않았었다. 성장하여 방송사에 입사한 후 멋진 내레이터 역을 도맡는 성우 Y씨를 부러워 한 일이 있다. 극의 흐름, 내용에 따라 음색과 호흡을 조절하고 감정을 실어서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뛰어난 감성과 연기력. 몇 번인가 Y씨가 맡았던 드라마 대본을 구해서 살짝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Y씨가 여러 드라마에서 내레이터로 인기가 있었지만 잊히지 않는 드라마가 있다. 내용은 미혼의 청년이 연상의 유부녀와 사랑을 나누는 퇴폐적인 것이었다. 방송에 적합하지 않을 것으로 연출자나 동료들이 염려했었는데 작가가 미묘한 심리적인 흐름을 해설로 처리하고, Y씨가 감칠 맛 있게 연기하여 아직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인간 사이의 관계도 이런 내레이터가 있다면 싸움도 반목도 없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생소한 사이를 친밀하게 해주고 적응하게 해주는 내레이터. 내레이터는 연기자면서 청취자, 시청자 관객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만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게 숨어 있는 비밀도 풀어내서 의미 있게 만나게 하는 내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것도 많다. 얼핏 생각해 보면 너르고 너른 인간사를 집약시켜 해석해 주고 인생을 바람직하게 여기게 하는 철학이 내레이터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것의 의문을 풀어주는 학문들도 사람들의 내레이터가 아닌가. 그리고 뛰어난 내레이터는 각종 종교에서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인간과 신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고 바람직하게 살게 하는 경우일 것이다.

어느 특정 직업인이나 개인의 경우가 아니고 모든 예술작품은 학문처럼 자연과 인간의 내레이터라고 하고 싶다. 그것도 학문보다 부드럽고 아름답게 내레이터의 역할을 해낸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한 장의 그림이, 한편의 소설이 인간사를 쉽게 해석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수필인으로서 작품을 쓰고 있으니 연기자로서의 내레이터는 아니지만 인생 내레이터로서의 역할은 주어진 셈이라고 할까. 수필이 내 인생의 자화상이지만, 내가 살아온 내용이나 마음가짐보다 더 멋지게 전달하고 싶은 내레이터 역할은 사양하고 싶다. 그러나 남과 이어진 인간관계에서 감칠 맛나고 의욕이 솟구칠 만한 값진 내용만 간추려서 다리가 되는 내레이터 역할을 하고 싶다.

급변하는 세태에서 너무나 엉뚱하고 생소한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가운데 잘 정리해서 감동을 주고 싶다. 힘든 처지에서도 아름답고 바른 길을 가려는 이에게 지름길을 귀띔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치 있는 일을 기억에 남겨주는 내레이터가 되고 싶은 과욕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