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최종고

 고향에 있는 친구로부터 소포가 하나 왔다. 농사를 지으며 나이 50을 넘기고 문화원에 자문위원이 되었다더니 거기서 출간된 책들을 한 뭉치 보낸 것이다. 그 중 『상주한문학尙州漢文學」(권태을 저)이란 책을 읽어보면서 나는 끝없는 상념에로 빨려 들어갔다.

내 고향 상주는 예부터 경주와 함께 경상도를 대표하는 옛 고을임은 알려져 있지만, 선조들의 문인정신이 이렇게 면면이 계승되어 온 줄은 이 책을 통해 새삼 알게 된 것이다. 명색이 대학 교수로 저서도 여러 권 내어 보았지만 고향의 문학정신에 대하여는 독특한 감회가 느껴진다. 책에 실린 수많은 선조 문인들의 작품을 언급할 수 없지만, 바로 내가 태어난 마을 주변에서 이루어진 아름다운 옛 일들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월간月澗 이전李l(1558~1648) 선생이라면 임진왜란 때 상의군尙義軍을 조직해 대항하였고, 그 후 피폐한 향촌 질서를 재건하기 위하여 남촌향약南村鄕約을 작성하여 향민을 선도한 학자였다. 나는 그 후손들과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기 때문에 그 유택 체화당m華堂에도 여러 번 놀러가곤 하였다. 그런데 이 선비가 사회적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시심詩心으로 가득 찬 분이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는 1612년 겨울에 집에 매화가 아름답게 핀 것을 혼자 보기 아까워 이웃 마을의 선비들을 불러 한 잔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시를 지어 연작시집을 만들었다.

화분의 매화 완상하며(爲賞盆中梅)

기쁘게 앉아 봄을 맞네(欣逢座上春)

화창한 기분 방안에 가득하고(絪縕和滿室)

깨끗한 맑은 기운 사람에게 스미네(皎潔冷侵人)

본시 신선의 등골이 바뀐 것(本換三淸骨)

어찌 한 점의 티끌인들 용납하랴(寧容一點n)

새로운 시는 아직도 보타에 남아(新詩留寶唾)

이별 후 꿈속의 혼과도 친하리(別後夢魂親)

 

이런 가경佳景이 계기가 되어 이들은 시회詩會를 만들었다. 이름을 연악문회淵嶽文會라 하였는데, 그것은 인근의 연악산 기슭이 유난히 아름다워 그곳으로 소풍을 가서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 1622년에 낸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을 보면 연악골에서 비를 만나 이틀을 묵으며 28수의 시를 연작으로 지어 한 권으로 묶어 내었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이곳 소나무밭에 앉아 동시를 지었는데, 나에게 흐르는 자그만 시심詩心도 조상들로부터 은연중 물려받은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역사가 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정신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문인정신과 낭만이 내 고향에만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옛적에는 벼슬을 한다는 것이 모두 인문학에 기초를 두었고, 벼슬을 그만두면 홀연히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바로 선비정신이었으리라. 그 시절을 생각하면 선조들의 기상과 운치가 존경스럽다. 고향을 떠난 배반자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녀도 한편으로는 늘 방랑객처럼 느껴진다. 수 년 전 안동 출신의 한 대학총장이 불의에 사망하여 고향에 묻히는 것을 보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고향이란 이런 저런 의미에서 운명과 같은 곳이다.

지금 세상에 술이 없는가, 전화가 없는가, 자동차가 없는가? 그럼에도 이런 낭만과 인정은 사라져만 가고 있으니, 도대체 인간된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나도 이런 세태를 아쉬워하는 인간이지만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문인정신의 기본도 잊어버리고 사는 학자라는 이름이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이런 고향을 남한에 가진 것만도 행복일까? 재작년 봄 고향 마을에 심은 벚꽃 50그루가 꽃피기 시작하면 친구들과 함께 내려가 꽃놀이라도 해야겠다. 그때 한 수 지을 내 시가 과연 조상의 시 수준에 어느 정도나 미칠런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내가 후손에게 대대로 내려줄 것이란 이런 문인정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수필집 『신 서유견문』, 『하버드 스토리』, 시집 『플루메리아 바람개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