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 깊은 물도 진하다

 

                                                                                                 정부영

 언제 닦여졌는지 한강 북쪽으로 뚝을 끼고 잠실에서 일산까지 자전거 도로인지 산책로가 생겨났다. 중간 허리쯤 되는 두세 개 구간의 대교 사이를 왕복하면서 하루하루에 쉼표를 찍어간다. 긴 겨울 하루가 상쾌하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이 펑펑 쏟아진 날, 눈부신 눈길 위를 한 발씩 내딛는 상큼한 맛이라니……. 이럴 때는 ‘태초’나 ‘처음’이라는 말과 함께 가벼운 흥분이 일고 설레이는 것이 어릴 때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나이를 접은 채 눈길의 한가운데를 도장을 찍으며 걸어간다. 강 가장자리에는 강물이 얼어붙어 눈이 양털 이불처럼 포근하게 덮혀 있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오던 길을 뒤돌아본다. 그리 넓지 않은 산책로에는 선명하게 찍힌 두 사람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진다.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흘러가기나 할 것처럼…….

무심코 바라본 나란히 찍힌 발자국에서 갑자기 정다움이 느껴진다. 넓디 넓은 설원에서 멀리 보이는 오두막이 주는 아늑함이라든가, 한밤중 숲 속에서 희미한 등불을 볼 때의 따스함이 거기에도 있다.

갑자기 ‘가족’이라는 말이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가족만이 느끼는 사랑`─`새 생명의 탄생이 주는 샘솟는 기쁨, 오랜 세월을 같이 멀리 바라보는 부부애, 끈질긴 형제애 그리고 가슴 저미는 듯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새삼스레 휘젓듯이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얼마 전 TV에서 성덕 바우만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엮어 방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미 전에 크게 보도가 되었듯이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골수 이식을 받아 새롭게 태어났고,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을 엮는 다큐멘터리였다. 성덕 바우만과 그의 양부모 가족들은 솔직한 심정을 적나라하면서 담담하게 얘기해 나갔는데, 그 장면들은 시종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났다. 그를 입양한 양부모는 그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단다. 성덕 바우만을 친아들처럼 여겨 자녀들과 함께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뒹굴면서 키워 한가족으로의 끈끈한 유대감을 주고 사랑을 배워주었다. 가족이란 혈연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과 서로를 아껴주는 결속력이 바탕이 된다고 믿게 하였다.

“내 친아이들은 신으로부터 주어졌지만 이 아들은 우리가 선택을 하였으므로 책임을 지고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주고 싶었습니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서 조건 없는 사랑을 읽었다. 그 넉넉한 마음이 이루는 사랑의 승리가 우리를 밝고 따뜻하게 해주어서 흐뭇하고 기뻤다.

저것은 인류애에 가까운 사랑이구나. 피가 섞이지도 않고 더구나 피부색이 다르고 말과 습관이 다른 동양인을 양아들로 삼아 어떻게 무조건의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하여 한동안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내 존경을 넘어 섬뜩해지면서 아린 감정을 갖게 했다.

가족이란 얼마나 큰 인연인가. 멀게 느껴지는 인연이란 표현보다 그냥 그렇게 되어진 필연적인 관계이지 않나. 동양적이고 종교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혈연관계는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덕 바우만 같이 그들의 선택으로 가족을 이룬 경우는 사랑과 이해를 서로 나누며 오랜 시간을 배워가야 할 것 같다. 사랑을 주고 또 받는 실천의 의지가 없이는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성덕 바우만은 그가 얻은 사랑을 대물림하듯이 결혼으로 생긴 두 딸에게 아낌없이 주겠다고 진지하게 말하였다. 그렇게 배우고 배워주는 사랑이 한없이 위대해 보인다.

여태까지 이런 사례는 알게 모르게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새삼 가족이란 명제를 부각시키면서 나에게는 자격지심과 변명할 여지까지를 주었다. 내게는 그만한 사랑의 자리가 있을까. 불행을 안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적선하는 식의 피상적인 관심이 고작이지 않나. 울타리를 치고 내 영역의 사람에게만 사랑을 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자괴감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 생각도 얼마 동안일 뿐 안이하고 편한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그만한 아량과 용기가 없다고 포기하며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그들의 인류애는 알아갈수록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내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일이 싫기까지 한다.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사랑의 실천이고, 대다수가 못하고 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인류애에 가까운 사랑은 아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극을 얼마 전에 보았다.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신파극의 초대권을 가지고 극장 안을 들어서니 관객은 중년 이상의 연령층이 대다수였다. 현대 감각에 걸맞추어 변사를 등장시키고 코믹한 장면도 연출하면서 신파조의 옛 극을 한껏 살려 내려 하였다. 많이 알려진 소재와 내용으로 중년층 이상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젊은층에게는 효의 이미지를 살려내는 데 주제를 맞추었다.

여기에서의 가족은 혈연관계였다. 무엇보다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 상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극 중에서는 아들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희생하는 어머니의 대사가 많이 나온다. “거적을 쓰고 길거리에서 죽어 수레에 실려 나간다 해도 내 아들만 잘 된다면……”이라든가, “저승 속 불구덩이에 빠져 죽은들 여한이 없다”든가, 또는 생선 장수를 하며 아들 학비를 대는 어머니가 “숨이 차서 오십 리 길바닥에 코를 박고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는 엇비슷한 대사가 자주 나올 적마다 모성애의 강렬한 이미지에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 어머니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휘몰리면서 아들의 잘못을 대죄해 가며 그의 행복을 위해 헐벗고 굶주리면서 희생한다. 그리고는 미련과 원망을 모두 버리고 떠나가고 만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은 얼마나 지고지순하고 강렬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왠지 이런 대목들이 나를 자꾸 왜소하게 주눅들게 하며 거부감까지 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와 똑같지 못하다는 어머니의 입장 때문일까.

나는 가끔 노후를 걱정한 나머지 실버타운이라든가, 간병인이 있는 노후 생활을 설계해 본다. “열 아들보다 배우자 하나가 낫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주었으니 되돌려받는다는 산술적인 감정도 무시할 수가 없다. 효를 강요하기도 한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부모들도 노후 생활을 자식한테 전적으로 의탁하지 않고 떨어져 살면서 서로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보편적인 풍조이기도 하다. 그런 보편성에서 나는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부모 자식 간의 이기적이고 실질적인 자기애에 그래도 무언가 섭섭하고 서글픈 심정이 없지 않다. 왜 불구덩이에도 들어갈 만한 헌신과 사랑이 없는가 하고……. 어머니의 사랑도 시대에 따라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고 말 것인가.

거적에 덮여서 두 발만 덩그마니 내놓은 채 수레에 실려가는 어머니의 주검이 아이러니하게 자꾸 떠오른다.

사랑이 무엇인가. 오늘 또 깊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