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김서령

어려서는 흙바닥에 물두멍이 있고 두 개의 아궁이에 가마솥과 동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었다. 큰 솥엔 밥을 하고 작은 솥엔 국을 끓인 후 큰 아궁이에는 된장찌개 냄비를 얹고, 작은 아궁이에는 석쇠를 올려 김을 굽거나 간고등어를 구웠다. 뜨겁고 어둡고 바쁜 부엌이었다. 나는 고작 열세 살에 그 부엌을 떠났다.

그 후 내 소유의 부엌을 여러 개 거치면서 밥상을 차렸고 혼인을 했고 아이를 길렀고 나이를 먹었다. 요즘도 나는 여전히 부엌을 서성거리며 밥상을 차린다. 아마 죽기 전까지 언제나 그럴 것이다. 쌀을 불리고 국거리를 다듬고 마늘을 다지고 양파 껍질을 까고 찌고 굽고 튀기고 삶으면서.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라고 주장하는 글을 읽으며 고개를 아무리 끄덕거려도 나는 이미 사과 한두 알, 감자 몇 개, 날 야채 한 바구니로 하는 식사보다 엄마가 옛 부엌에서 하던 온갖 양념들, 무치고 데치고 고아내던 음식맛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기억나는 숱한 부엌이 있다. 여고 때 살던 안동시 동문동 192번지의 집은 방문 앞 연탄 아궁이 위에 지붕을 이은 가건물로 달아서 만든 부엌이 있었다. 구멍이 세 개 뚫린 블록 벽돌로 지은 가건물은 벽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이쳤다. 마룻장을 들치면 연탄 아궁이가 나오고, 왜 그런지 이름이 두꺼비집이던 무거운 무쇠 뚜껑을 들치고 냄비를 얹어 밥을 했다. 화력이 센 연탄불에 알루미늄 냄비를 얹어서 짓는 밥은 다른 연료로 짓는 밥과는 전혀 다른 밥맛이 났다. 잠깐 방심하면 냄비채 까맣게 태우기 십상이었지만 밥맛만은 고슬고슬하게 달았다.

동문동의 달아낸 부엌 블록 담의 구멍에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는 편지 봉투가 언제나 꽂혀 있었다. 집에 들어오면 일단 연탄 아궁이의 불구멍을 열고 다음으로 편지 봉투를 열었다. 봉투 속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말들로 방안이 금방 뜨겁게 달구어졌는지, 열어놓은 불구멍이 그토록 효과가 좋았는지는 지금껏 미확인이다…….

대구시 대현동 240번지의 자그만 이층 자취방에는 부엌이 없었다. 현관문 앞에 연탄 아궁이가 있어 난방을 감당했지만 현관을 끼고 돌아 자그만 세면대가 놓인 공간이 곧 부엌이었다. 거기서 내가 즐긴 요리는 세면대에 물을 받아 뽀득뽀득 씻은 오이를 채 썰어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매웁게 비벼먹는 비빔국수였다. 국수를 먹고 그 자리에서 땀이 솟은 얼굴을 아까 오이를 씻듯이 뽀득뽀득 씻었다. 세면대 위에 나무 도마를 걸치고 비스듬히 서서 오이를 채 썰던 이십대의 나는 행복했을까. 다른 미래, 다른 시간과 공간이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리라는 기대와 갈망이 있어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그 시점을 즐겼던 기억은 없다. 웅크린 젊음이고 주눅든 청춘이었다.

그러나 나는 머지않아, 아마 서른이 넘자 말자, 삶이란 미래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생이란 어느 날부터 본격적인 카운트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바로 인생의 핵심임을 당황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고향의 부엌을 떠난 후 여러 자취집의 전전을 마치고 처음으로 내 집이 생기는 날이 왔다. 내 결혼을 의아해 하고 미심쩍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주변 사람이 딱히 누구인지는 명백치가 않다. 부모인지 친척인지 친구인지, 실체가 모호하나 내 판단과 가치관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주변 사람’이란 이름의 우상이 내게는 언제나 큰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씨족 농경사회에서 수십 명이 함께 먹을 가마솥에 지은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다분히 불순한 의도에서 사게 된 집이었다.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니 자연 무리가 따랐다. 번듯하지도 아담하지도 않은 산꼭대기의 집을 마당에 꽃잎이 가득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했는데 돈이 모자랐다. 안방을 전세를 주면 모자라는 돈이 보충된다는 복덕방의 제안을 좇아 우리는 바깥의 작은 방 한 칸에 짐을 부렸다. 9자, 10자 정도의 작은 방에 장롱을 넣고 책장을 들이고 텔레비전을 놓아도 꽃병을 얹어 놓을 작은 테이블이 놓일 곳이 더 남아 있었고, 여분의 공간에 밤이면 이불을 깔고 세 식구가 누워도 자리는 넉넉했다. 신비한 방이었다. 유일한 문제라면 부엌이 없다는 점이었다. 벽과 바깥 담장 사이에 연탄 아궁이가 놓인, 사람이 들어가기는 어려운 길쭉한 공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우선 거기를 부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부터 지어두면 결국 이름에 부응하는 내용이 갖춰지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나 공간에게나 공히 통용되는 진리인 모양이었다. 워낙 좁아서 똑바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부엌의 기능에 별 무리는 없었다. 게걸음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만 빼면. 옆으로 이동하는 갤러핑 스텝을 경쾌하고 능란하게 구사할 즈음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가 생겼던 것이다. 뱃속의 아이가 커지면서 내 배는 담장과 벽 사이에 꽉 끼여버렸다. 부른 배를 하고 모로 앉아 나는 그 부엌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카레라이스를 만들고, 남편이 좋아하는 시래깃국을 끓였다.

빨간 방울 토마토와 마당에 자라는 박하 잎을 계란 노른자 위에 얹어 아이에게 대비되는 색감을 가르쳤고, 텔레비전 여성 프로에서 배운대로 천연 조미료를 만들어 화학 첨가물을 배척하는 법을 실천했다. 그 해 내가 입은 옷들은 모조리 달 표면처럼 크고 작은 융기가 생겨났다. 니트 옷의 보풀은 더욱 심해서 뱃속에서 아기가 태동하면 거친 시멘트 벽에 쩍쩍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그게 재미있어서 나는 깔깔 웃었고, 두 돌 지난 방안의 아기도 괜히 까르륵 따라 웃곤 했다.

다음 해 드디어 안방을 차지했을 때 내 부엌은 형이상학을 끌어내는 구조였다. 공간이 인간을 규정할 수 있을까.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풍수지리가 결국은 그것 아니겠나. 새 부엌에서 내다보면 온 동네의 크고 작은 집들이 창문 아래에 겸허하게 엎드려 있었다. 저녁 쌀을 씻으면서 가련하고 겸허한 목숨들이 어둠 속에 점점 묻혀가는 것을, 눈물을 글썽이듯 창문마다 불이 켜지는 것을 날마다 내다봤다. 그러면서 30대와 40대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나는 행동하기보다는 관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최근 내 부엌은 새로워졌다. 그토록 원하던 개수통이 두 개인 싱크대(나는 20년 동안 설거지통이 한 개인 부엌에서 설겆으면서 남의 집 두 개짜리 싱크를 부러워했다)와 버너가 여러 개인 가스대가 놓이고, 미켈란젤로의 인체 해부도처럼 손을 상하 좌우로 힘껏 휘둘러도 아무것도 걸치적거릴 게 없는 부엌이다.

최근에 들은 농담 하나. 아들 집에 사는 시어머니는 골방에서 죽음을 맞고, 딸네 집에 사는 친정어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순직’을 한다나. 부엌 근처에서 순직하는 것이 골방에서 순명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찬 결말이 될 거라고, 십 년 내에 아들과 딸을 혼인시킬 예정인 늙어가는 우리들은 만장 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가만히 따져보니 죽음의 장소로 부엌만큼 멋진 곳도 없을 듯하다. 열세 살에 집을 떠난 후 처음으로 나는 부엌과 죽음을 겹쳐 놓아 본다. 옛집, 엄마의 부엌은 원래부터 죽음과 친밀했었다. 우선 어둡고 깊고 불길이 활활 타는 평화가 있었고, 누대를 내려오면서 거기서 안방으로 자리만 옮겨 돌아가신 웃대 할머니들이 숱했고, 일 년에 열두 번씩 제사 음식과 향불을 덜어 내 간 곳이었으니 죽음은 아궁이 속에, 빈 솥 안에 상주해 있었다.

새로 생긴 낯설지만 익숙한 내 부엌을 둘러본다. 손을 휘저어보고 쓰다듬어보고 수납장을 열었다 닫아 본다. 이만하면 쓸 만하다. 더구나 집 뒤란으로 제법 늙은 소나무가 내다보이고, 식탁과 싱크대 사이에 내 한몸 온전히 드러누울 만한 여유 공간이 있다. 누워서 늙은 소나무를 내다본다. 나무 껍질이 절로 떨어지는 것을 구경한다. 이젠 쌍둥이를 배 안에 기른다 해도 옷에 보푸라기가 생길 리는 없는데 내겐 폐경의 징후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니 까르륵 웃어 본 지도 한참 오래되었다.

 

 

수필가. <동서문학>으로 등단(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