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의 세상, 세상 속의 이야기

 

                                                                                                    박현정

 사랑하는 남자와 둘만의 결혼식을 위해 교회에 들어가려던 여자는, 급하게 뒤쫓아온 남자의 어머니와 마주친다. 어머니는 평소에 갖고 있던 우아함을 떨쳐버리고 심하게 여자를 몰아세운다. 감히 네가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어림없는 소리. 만일 네가 이 문을 열고 들어갈 경우 너희 집안을 풍비박산 내겠으니, 부모와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가서는 멀리서 여자를 지켜본다.

남자는 교회 안에 서서 여자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여자는 교회 밖에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하며 갈등한다.

이 장면을 보는 시청자는 착한 여주인공이 또다시 사랑하는 이와 맺어지지 못할까봐 가슴을 졸이며 안타까워한다. 드라마 이름과 배우의 얼굴, 배경만 바뀔 뿐 뻔한 스토리를 쓰고 또 쓰는 작가들과 이와 비슷한 숱한 이야기를 연기하는 배우들. 또 유사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고 들으면서도 매번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들.

신데렐라나 콩쥐팥쥐 류의 이런 연속극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도 이야기로서의 재미나 가치를 주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 깊이 잠재된 사랑을 향한 열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 어찌 거기에 사랑만 있을까.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거나 인과응보의 법칙과 같은 교훈과 함께 신분 상승 욕구도 있고, 변화에 대한 갈망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이야기 안에는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을 기다리며 방황하고 있다.

여자는 결국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거듭되는 사랑의 시련에 남자 주인공은 분개하고, 여주인공은 그런 남자를 몰래 지켜보며 말 없이 떠나보낸다. 그녀는 차마 부모를 저버리면서까지는 남자에게로 가지 못한다. 그러나 시청자는 안다. 다시 그들은 만나게 되고 맺어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드라마를 보며 생각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었고,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위해 동생을 처참하게 죽인다. 또 아리아드네는 적국의 왕자 테세우스를 돕고. 아버지의 조국 카자흐를 버리고 폴란드 여인을 위해 싸운 불리바의 아들 안드리. 그러나 그들의 어긋난 희생이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리를 저버리고는 사랑도 얻을 수 없는 법이라고.

착한 주인공이 어떤 좋지 못한 동료를 만나 속임수에 빠지고, 마음을 다치는 고생을 해도 결국은 승리한다는 믿음은 전래 동화가 주는 정서적 안정감의 하나다. 특히 선인과 악인이 분명한 드라마가 마음을 더 사로잡는데 그것 역시 전래 동화와 비슷하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무엇보다 그곳에서 들려주던 성서 이야기에 압도되었다. 거기에는 거의 벌거벗은 고대인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죽이기도 했고, 나팔 소리로 거대한 성을 무너뜨리는 마술도 있었다. 그것은 살과 피가 튀는 고대인의 역사였고, 내가 처음 접한 이야기였고 세상이었다. 교회에서 이야기에 취해 돌아오면,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다음 날 이불 속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때 나는 이야기 속의 세상과 내가 살아야 할 곳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나는 세상 속에서 옛이야기들을 만난다. 서로의 벽을 허물지 못해 애증으로 고통받고, 사랑하는 이에게 기꺼이 속아주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현실의 내 이웃에 있다. 그것은 빛깔과 강도만 달리 할 뿐이다. 해외로 입양되어 자란 숙녀가 자신의 친부모를 찾으러 고국을 방문하고, 돈 때문에 아이를 유괴하기도 하는 어른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먹을 것이 없어 아이를 숲 속에 버리고, 그 아이를 잡아가는 식인귀 동화가 중세의 어두운 이야기만이 아닌 지금 이 세상의 현실일 수 있음을 생각한다. 수금 연주로 저승의 신조차 감동케 하고, 피리 소리로 아이들을 흔적없이 데려가며 아르고스의 백 개나 되는 눈을 잠들게 한 이야기에서, 나는 음악이 주는 위로와 열락의 이미지를 읽곤 한다.

현재의 순간이 과거가 되는 현실에서 이야기는 과거의 재구성이 되어버리고, 그런 이유로 이야기는 미래처럼 꿈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지나온 날을 재편집해 들려준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인간의 본능은 죄인까지도 가려 있던 죄를 고백하게 한다고 들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강아지는 별다르게 생각지 않으면서도 그 강아지를 그린 그림에는 특별해 하듯이, 우리의 삶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되고 드물게는 예술로 될 수 있다.

우리 삶에 남는 것은 우리가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최후의 승자는 지난 날을 돌이키며 이야기할 수 있는 자인지도 모른다. 긴 여행에서 모험을 끝내고 돌아와 돌에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새기는 길가메시처럼 우리의 삶도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사람들은 후손을 낳아 기르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닌지. 인간은 유한하기에 마음 깊이 불멸의 욕구를 감추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 속에 구덩이를 파고서라도 외쳐야 했던 이발사처럼 나는 우편함에 넘쳐나는 소식지들과 책들을 보며, 무심한 세상에서 자기 표현에 목말라 하는 많은 소리들을 듣곤 한다. 수필 한 편을 쓰면 실리지도 않을 곳에 기를 쓰고 보내곤 하는 내 조급한 욕구를 떠올리며 웃는다. 나는, 나는, 나는이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오만과 갈증을 담지 않은 마음이 있을까.

우리가 드라마나 연극 혹은 책으로 만나는 이야기들에 끌리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이나 그들의 속마음을 신처럼 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두 눈을 가리고 현재라는 시간의 벌판을 건너가야 한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때의 진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실재 우리들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그처럼 잘 헤아릴 수도 없다. 바로 그 헤아릴 길 없는 사람들 마음 속 공통 분모를 찾는 즐거움 때문에 사람들은 이야기에 몰입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때는 공통 분모 속에 자신의 그림자도 있음을 짐작할 것이다.

 

작품 속 인물만이 아니라 현실의 우리들도 역사와 개인이 지나온 이야기의 층 위에 서 있다. 자신만이 간직한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숨결 속에서 우리는 가끔 숨겨진 자아와 만나게 된다. 아마 거기서 만나는 이야기의 질에 따라 그것이 우리를 일으키는 힘이 될 수도 있고, 좌절하게 하는 무의식적 걸림돌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간혹 삶이 짐스럽게 여겨지거나 뭔가에 집착하게 될 때, 모모에서 기롤라모가 한 말을 떠올린다. 온 세상이 하나의 긴 이야기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연기를 하는 거라는 낙천적인 말을.

사람들의 하루는 개인의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꿈과 현실, 낮과 밤이라는 배경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야기를 쓰되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그 무엇도 함께 쓸 수 있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계간 수필>로 등단(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