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 속에 나

 

                                                                                                    이현복

오늘 2002년의 끝자락 12월 5일 아침이다. 전 날은 몹시도 바빴다. MBC 문화센터 강의, 중앙문화센터 강의를 마치고 <수필춘추> 금년도 신인상 시상식 및 <수필춘추> 가족 송년 모임을 가졌던 날이다. 홀가분해야 할 날인데도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새벽 4시, 눈이 떠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어느 책에서 읽었던 탈무드의 말이 머리에 잠깐 스친다.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을 얻는다. 그 하나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고, 그 둘은 친구들이 붙여 준 애칭이며, 그 셋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얻은 명성이다”란 말이다. 머리는 맑아온다. 스위치를 눌렸다.

이현복(李賢馥)이란 내 이름은 李는 오얏으로 귀함이요, 賢은 착함이요, 馥은 향기라. 귀함과 착함이 어우러져 향기를 피움이니 듣기 싫은 괴음이 될 수 없다. 첫번째 부모님이 주신 이름 귀하게 살아 착한 사람되어 향기 품으라는 그 뜻을 다시 새긴다. 그런데 이 이름 외에 두 번째로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 많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나 보다. 그 이름들 어떻게 보면 애칭(愛稱)이요, 또 달리는 비칭(卑稱)이다. 작은 키에서 ‘꼬마’라 했다. 다리가 짧으니 발발리로 살아야 하니 묵직함이 없었나 보다. ‘까부리’, ‘촐랑이’를 겪으면서 ‘촉새’라까지 불리니 속상할 때도 많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할머니들 모임에서 재롱을 떨곤 하였다. 할머니들은 나를 보면 ‘재동이’라고 했다. 그래도 할머니들 앞에서만은 탤런트였다. 잘한다는 말을 들으며 민요도 타령도 제멋대로 잘도 불렀다. 그 때부터 나의 음치는 시작되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무던히도 까불며 성적 20점~3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논, 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에게 자랑한 기억들이 새롭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조회 시간이면 맨 앞 줄에 선 나를 두 손으로 얼굴을 들어올리면서 서울 구경시켜 준다던 유덕근 담임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촉새’라는 별명이 부끄러웠다. 한 반에서 늘 1등을 하는 사촌형(서울교대 교수)이 부러웠다.

이 ‘재동이’는 시골이었던 분당 양영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면서 1,000여 명이 응시한 고등학교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100여 명 속에 끼었고, 당시 천하부고에 합격한 것은 ‘재동이’란 애칭이 준 선물일 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다. 화학 시간 이일규 선생님의 질문에 얼마나 엉뚱한 대답을 했으면 “야! 이놈아 너는 아인슈타인이다”이라 했다. 고등학교 때 얻은 별명 ‘아인슈타인’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 그때부터 고정관념의 파괴, 엉뚱한 착각, 실천에의 용기 등등으로 나다운 나로 살게 된 계기가 되었나 보다. 그래, 이 ‘아인슈타인’ 훗날을 기약하자. 오늘의 나는 분명 내일의 내가 아니라는 생각의 끈은 놓지 않았다.

이 ‘아인슈타인’은 9: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서울 사대에서도 정치운동을 비롯하여 아주 조금은 평범하지 않았다. 교원 자격증을 받은 그 이튿날 나는 동국사대부고에 발령과 함께 고 3-2반 담임이 주어졌다. 국어 첫 시간의 일이었다. 나의 작은 키, 까만 얼굴, 볼품 없는 품위를 지니고 덩치 큰 고3 학생들 앞에 서니,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듯 제멋대로였다.

대면 인사를 마치니 쏟아지는 야유의 질문들에 정신이 아찔했다. “연세?”, “결혼?” 등등이다. 나이는 26세이고 결혼은 했다고 답한 다음 태도가 안 좋은 놈 두 학생을 “나와”라며 불러내었다. “고3, 건방 떨지마, 나도 고3 다녀봤다”며 빗자루로 얼마를 때렸는지 지금도 기억에 없다. 여기에서 얻은 별명, ‘나와’가 1년 6개월 이어졌다.

1965년 10월 5일 교육위원회로부터 서울 청량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 다음 날 “우리는 학생이 아니냐?”며 우리 졸업할 때까지 전출 불가라며, 그 넓은 운동장에 전교생의 데모가 벌어졌다. 정말 깊은 고뇌의 하루였다. 운동장에 앉아 있는 학생들, 강당의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몸싸움을 하시던 고등학교 때 은사 최식근 장학사님의 땀방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밤에 집에 달려와서 눈물로 호소했던 그때 그 학생들 지금은 모두 환갑이 지났겠지? 난감해 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람의 눈빛이 지금까지 선하다. 이 ‘나와’의 위력은 내 교단 생활에서 절정이었다.

청량중학교에 부임했다. 고3 국어에서 몇 달 동안 1학년 국어 담당은 너무나 어려웠다. 중2 최우수반 담임을 마치면서 ‘아인슈타인’의 기질과 ‘나와’의 패기는 중3 열등반 담임을 자처하게 했다. 연속 열등반 담임, 보람이었다. 순박했던 아이들이 좋았다. 이 학생들은 소풍을 가든, 교외에 나가면 내 뒤에서 멀어지지가 않았다. 그때에 얻은 별명이 ‘아버지’다. 사부(師父)란 말을 실감한 3년이었다.

이 ‘아버지’는 순환 기간 4년을 못 채우고 초창기 서울 사대부여중으로 전근하여 1년 6개월만에 꿈에 그리던 모교 서울 사대부고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사랑하는 내 후배들이다. 그들의 앞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되자는 생각이 재직 10여 년간 머리에 머물렀다. 고3 담임 6년의 세월 속에서 때려서라도 사람 만들어 달라는 학부모님들과 선배님들의 압력은 너무 컸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나와’의 기질만이 나를 이끌었다. 눈에 거슬리는 꼴을 못 본 나의 체벌은 끝이지 않았다. 그 때 얻은 별명이 ‘돌쇠’였다. 그 연유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이 ‘돌쇠’는 인천교대로 전출하면서 어떤 별명이 붙었는지는 훗날 이어지리라. 그리고 어느 훗날 이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이름이 붙여질까 두려워짐은 웬일일까.

마지막으로 얻은 이름, 능인선원 지광(智光) 스님이 주신 법명 현산(賢山)이다. 여기에 담긴 뜻을 되새겨보는 동안 아침이 다가왔다. 나는 나의 첫번째 이름 이현복(李賢馥)을 소중히 생각한다. 또 그래야만 한다. 아버지가 주신 이름, 나와 함께 50여 성상 영욕을 짊어지고 살아온 이름이다. 두 번째 이름 별명은 내 그림자로 지닐 일이요, 세 번째 이름 명예는 애시당초 나와는 거리가 멀기에 접은 지 오래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

나에게 준 별명이 올바르게 살라는, 아니면 뒤돌아보라는 뜻으로 지어 주었으리라. 고맙기 그지없다. 너희들의 성공과 건강을 빈다.

내 삶과 같이 한 별명들을 연상해 보며 그때, 그때의 내 모습을 되새긴다. 호흡이 육체의 생명이듯이 이름들은 정신의 생명인가 보다.

아침식사 준비가 다 됐다는 집사람의 목소리가 청량하다.

 

 

인천교대 교수. <수필춘추>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