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놀기

 

                                                                                                      權一周

“신문지 한 장만 손에 쥐어주면 그걸 가지고 꾸겼다가 찢다가 하면서 하루 종일 저 혼자 잘 놀았어. 배가 고파도 울지를 않았지.”

누군가에게 어릴 적의 나를 이야기하실 때마다 어머니는 이 한 마디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무던한 아이였다는 것을 이 말에 담고 싶어하신 것이었지만 정작 본인인 나는 누군가가 써놓은 그림 동화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보는 느낌뿐이었다. 아직 걸음마도 배우지 못한 아기 하나가 저 혼자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꾸겨진 신문지와 놀고 있는 그런 그림이다. ‘나’이면서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런 ‘나’이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나는 늘 무언가 공상을 하면서 혼자서 놀고 있는 ‘나’이다.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상당히 여러 번 전학을 다녔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사를 가는 트럭 위 짐들 사이에서 차의 뒤꽁무니를 보고 앉아 빠르게 뒷걸음치던 신작로와 휙휙 지나가는 산들과 하늘의 구름 떼 그리고 때로는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나는 맘껏 공상을 펼치곤 했었다. 주로 새로 전학갈 학교와 친구들, 그 속의 나에 관한 것이었지만 공상 속에서 난 언제나 무엇이든 잘하는 아이, 때로는 신통력까지 가지고 있는 아이로 등장했었다. 나는 늘 공상을 하며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였다.

이렇게 공상을 하던 버릇은 더 이상 이사를 다니지 않게 되고 나이를 먹어가자, 이번에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어 잠이 들기 전까지의 시간대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무언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는 그것을 그때 유행하던 라디오 연속극처럼 매일 매일 이어갔다. “가만 있어봐, 어젯밤에는 어디에서 끝났지?” 하고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어젯밤의 마지막 장면을 물어가며 이야기를 꾸며 이어갔다. 아직도, 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능력의 한계라는 것이 없었다. 줄을 멋지게 타는 곡예사가 되어 매번 새로운 기술을 펴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늙수그레한 집사가 우아하게 시중을 드는 영국의 옛 성의 주인이 되기도 했으며, 한 해의 모든 신문사 신춘 문예의 당선자가 알고 보니 각각 다른 이름으로 응모한 ‘나 혼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공상과 상상 사이를 멋대로 오가며 노는 것을 즐기는 어른으로 되어 갔다.

좀더 나이를 들면서 어느 날인가 문득 나는 ‘오늘의 나’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불만투성이의 또 다른 내가 공상을 자꾸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결코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는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생활 속의 나’로 들어가려 했다. 그 무렵의 생활의 무게도 나를 거들어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에서도 상상력이 없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나를 부른다. 가까운 예를 하나 들자면, 소위 SF 영화라는 것에 난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온 세계가 재미있어 하면서 2부작, 3부작을 만들어내고 유사한 것의 포스터가 계속 내걸려도,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나는 도저히 감정이입이 안 되는 것이다. 점점 상상력이 필요한 것, 추상적인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져갔다. 어쩌다가 내 상상력이 가까스로 가 닿는 것이 있어도 그것을 내 속으로 끌어당겨 자리잡게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한 술 더 떠서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 남에게서 들어 아는 것을 제 것인 양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사이버 세계니 뭐니 하며 시간의 블랙홀 속으로 쉽게 들어가는 것을 부러움 섞인 경이의 눈으로 보기도 했고, 또 많은 일들이 디지털화되어 획획 장면이 바뀌어가는데, 나 혼자만이 아직도 아날로그 초기적 화면 속에 갇혀 있나 하는 생각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나는 공상과 상상의 세계 사이를 오가며 꿈과 놀기를 좋아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무리 공상 속이지만, 이제는 조금 염치라는 것이 생겨서 어릴 적처럼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차마 꾸지 못하는 것이다. 내 두 발은 이미 이 땅에 너무나도 확실하게 붙어 있기 때문에 그저 내 눈이 가 닿을 만한 것에다가 조금 눈치를 봐가며 슬쩍 덤을 얹는, 그런 상상을 하며 꿈과 놀기를 한다.

한창 공상을 하며 꿈과 놀기를 즐겨 했을 때, 나는 ‘꿈의 견적서’ 같은 것을 내게서 한번 받아보면 어떨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잠시 해보았던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다시 고쳐 쓴 ‘꿈의 견적서’를 내게서 한번 받아보고 싶다. ‘5개 국어로 말하기’ 대신에 ‘종일 사전하고 놀기’를 집어넣고, ‘요술방망이’를 삭제하고 ‘일년 해외 무료 여행권’을 집어넣으면 어떨까. 물론 이것도 앞으로 또 몇 년이 지나가면 다시 고쳐 써야 할 날이 올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어떻게, 무엇과 노는가 하는 것이 삶의 빛깔을 바꾼다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고 싶어 해본 생각이다. 아무래도 난 다시 신문지 한 장으로 배고픈 것도 모르고 하루 종일 혼자서 노는 아이가 있는,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