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나무

 

                                                                                               김형진

거실에 앉아 유리창 밖 벌거벗은 나무들을 바라본다. 곧게 뻗은 거무스레한 줄기 둘레에 굵고 가는 가지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다. 그 중에는 찢겨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 꺾여 물구나무 서듯 대롱거리고 있는 것, 가지 끝이 아예 부러져 나가버린 것도 눈에 띤다.

바람이 분다. 봄을 재촉하는 꽃샘바람이 분다. 키 큰 나무들은 바람에 맨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다. 굳이 머뭇거릴 것도 서두를 것도 없다는 몸짓이다.

지난 해 가을, 우리 집 앞은 나무들의 공연장이었다. 여름 내내 꽃 한 송이 보여주지 않던 키 큰 나무들이 저마다 알록달록 치장을 하고 멋진 자태를 뽐내는가 하면, 한들한들 춤을 추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매혹적인 남저음男低音으로 노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공연이 극치에 이를 무렵, 나무들은 하나씩 둘씩 치장을 벗어 떨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외출할 때마다 나무들이 눈에 밟혀 귀가를 서두르곤 했다. 바람이 없을 때에 떨어지는 나뭇잎의 몸놀림은 숙연해 보였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라기보다 있어야 할 때와 가야 할 때를 알아 스스로 떠나는 현자賢者의 모습 같았다. 바람이 불 때 우수수 지는 나뭇잎은 군무群舞를 마치고 퇴장하는 무희들의 뒷모습 같았다. 나무들이 치장을 한 겹 한 겹 벗을 때마다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씩 조금씩 하늘이 열렸다. 여느 때보다 높이 떠올라 밝은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그런 하늘이 열렸다. 나무가 옷을 벗는 건 하늘을 열기 위해서라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된서리 몰아오는 바람 드센 밤을 며칠 새고 나자, 창 밖엔 이제 막 잔치 파한 마당처럼 적막이 흘렀다. 새침해진 하늘 속에 벌거숭이로 밋밋하게 서 있는 나무들. 여름 내내 높고 튼튼한 성벽처럼 도도하던 위용도, 가을철의 그 화려하던 자태도 간 데 없이 초라했다. 가지 사이로 환히 열린 하늘마저 성에 낀 유리창처럼 차가워 보였다.

한파를 몰아오는 삭풍이 거셀 때 벌거벗은 나무의 모습은 한심해 보였다. 바람의 기세가 사나우면 팽팽히 휘어졌다 기세가 뜸한 틈을 타 벌떡 일어서 부르르 몸을 떠는 애처로운 몸짓.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꺾여 대롱거리는 가지였다. 실낱 같은 생명선生命線을 사력을 다해 움켜쥐고 아슬아슬 공중 곡예를 하고 있는 모습은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자 창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그 위에 두꺼운 커튼까지 쳤다. 방안에 있을 때에도 내의를 챙겨 입고, 외출할 때엔 두꺼운 옷을 껴입었다. 운두 높은 신을 신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윤기 자르르한 외투를 골라 입기도 했다. 바람이 불다가 강추위가 몰아치고, 눈이 내리다가 바람이 불고……. 그렇게 겨울이 깊어갔다.

엄동치고는 제법 햇빛이 밝은 아침. 환기를 위해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워서 더욱 맑은 아침 기운이 얼굴에 끼쳐왔다. 모처럼 상쾌해진 기분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버릇처럼 벌거벗은 나무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 동안에 면역이라도 생겨서일까, 나무들의 모습은 초겨울과는 딴판이었다. 강추위에 몸을 떨지도, 괴로움을 호소하며 목숨을 애걸하지도 않았다. 이제는 살갗을 에는 추위나 드러난 환부患部쯤 별것이 아니라는 듯 머리를 곧추 들고 있었다. 그것은 체념을 넘어 달관의 경지에 이른 자의 의연한 모습 같았다.

그 뒤부터 아침마다 커튼을 걷어 놓고 나무들을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내리면 내리는 눈을 맨몸으로 받으며 차가움을 즐기는 듯했고, 바람이 불면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강추위가 몰아칠 때에도 다 드러낸 알몸을 꼿꼿이 세운 채 묵상하듯 서 있었다.

입춘 무렵, 햇살 좋은 아침이었다. 겨울의 매운 기운도 많이 누그러졌다.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천장에서 시작하여 벽이며 문이며 액자며 창틀이며 커튼에 엉킨 먼지를 털어내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면서 목이 칼칼해지더니 기침이 터져나왔다. 침이 사방으로 튀고, 가래도 퉁겨져 나왔다. 콜록콜록 기침을 계속하다 보니, 내 안에 쌓인 온갖 티끌들을 토해 내고 있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꽃샘바람이 기세를 돋구더니 기어이 줄기까지 잡아 흔든다. 키 큰 나무 줄기가 한바탕 휘청거리더니, 꺾여 물구나무 서듯 대롱거리고 있던 가지가 뚝 떨어져 내린다. 썩은 상처처럼 흉해 보이던, 할 수만 있다면 잘라내 버리고 싶던 가지가 시원스레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 긴 겨울 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몰아치는 강추위를 견디어 낸 키 큰 나무들. 허물도 흉터도 다 드러내놓고 스스로 견디며 치유하여 새 봄을 맞는 벌거벗은 나무들을 쳐다보며, 바람이 불면 옷깃을 여미고 추우면 겹겹이 껴입으며 겉모양 꾸미기에만 골몰해 온 내 모습이 얼마나 왜소하고 한심한지 고개를 떨군다. 벌거벗은 나무들이 저런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겨울에 옷을 벗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