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장合葬

 

                                                                                                김용석

지난 연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병환이 깊었지만 해를 넘기실 줄 알았는데, 서산으로 기우는가 싶은데 어느 새 저버리는 한겨울 짧은 해처럼 그렇게 떠나셨다. 꽃피는 봄이라도 보고 가셨으면 바랐는데, 쓸쓸한 겨울을 더욱 쓸쓸하게 남겨두고 떠나셨다.

하지만 상주들은 망자(亡者)에 대한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장례 절차에 대비해야 하고 장례식에 임하게 된다. 사실 어머니께서 임종하시기 전 병원 중환자실에 오래 계셨기 때문에 가족, 친척들 사이에서 장례를 어떻게 치르고, 장지는 어디로 할 것인지 계속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가운데서도 매장을 할 것인지 아니면 화장을 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이른바 화장문화 운동이 사회 전반에 걸쳐 꽤 폭넓게 퍼져 있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당연한 듯 화장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화장을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인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반면 선산先山을 보존하고 있는 가족들인 경우에는 되도록 그곳을 장지로 택하려 한다.

오늘날 화장 지지자와 매장 지지자들 사이에 논쟁이 격화되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이 그만큼 장례문화에 집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장례문화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구분 짓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인간이 문화적 동물이라는 의미를 확고히 해주는 것도 장례문화다. 장례를 둘러싼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차원들은 가히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번 있었던 가족 회의에서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4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함께 모시는 일이었다. 참으로 긴 세월을 홀어머니의 길을 걸어오신 분을 생각하면, 내게는 아버님과의 합장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것이 내가 두 분께 해줄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으로 판단되는 시대에 이미 사자(死者)가 된 분들을 함께 모신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냐고 물을지 모른다. 더구나 서구적 논리 구조 아래 교육을 받고, 그런 교육을 기반으로 학문을 하는 나 자신의 입장에서 보아도, 돌아가신 두 분을 다시 한자리에 맺어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은 미신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두 분이 함께 묻히면 한겨울 동토(凍土)도 따스한 이부자리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것이 미신이라면 적어도 ‘아름다운 미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장지가 어디든, 장례 방식이 무엇이든 합장에 초점을 맞추고 모든 일을 진행했다.

아버님은 오래 전에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선산 터에 모셨다. 어머님은 영세를 하신 가톨릭 신자이시다. 성당 묘지에 묏자리가 있다.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 산소호흡기를 끼고 계셨기 때문에 별도의 유언을 남기실 기회가 없었지만, 평소 화장을 매우 꺼려하셨다. 그래서 나는 집안의 주류가 주장하는 바를 거역하기로 했다. 즉, 화장을 해서 어머니의 유골을 따로 납골당에 모시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성당 묘지로 아버님을 이장해서 어머님과 매장으로 합장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 한 일인지, 아니면 합리적인 것인지 비합리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한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그것은 아버님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시던 어머님의 여한을 없애는 일이며, 두 분께 못해 드린 게 많아 자식인 내게 남은 여한을 줄이는 일이었다.

두 분의 관을 나란히 묻고 다시금 청실홍실 띠로 맺어주는 날, 나는 가족과 문상객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한 마디 했다.

“오늘 저는 두 분 합장식의 상주이자, 부모님의 새로운 결혼식의 주례올시다.”

그런데 곡(哭)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나온 이 말을 아무도 무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까지 상을 당한 충격으로 울음이 막혀 있던 누님이 “흑” 하고 가볍게 흐느꼈다. 나는 그 울음이 누님의 여한 또한 많이 줄여줬다는 것을 느꼈다.

삼우제 날은 겨울답지 않게 따스하고 하늘은 청명했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제(祭)를 시작할 무렵 산까치 한 쌍이 날아와 산소 옆 나목 위에 나란히 앉았다. 제를 끝내고 우리가 자리를 뜰 때까지 그렇게 한 쌍의 산까치는 다정히 나목 위에 앉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믿었던 합장의 미신을 증거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미신의 상징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해외 지사에 근무하느라 문상을 하지 못한 친구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애도의 뜻과 함께 좀 어떠냐는 위로의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답신으로 쓸 줄도 모르는 시詩를 한 편 써 보냈다.

 

엄마를 묻고 왔다

 

엄마를 아빠 곁에 묻어서

여한이 많이 줄었다

 

산까치 한 쌍이

산소 옆 나무에 앉았다

 

여한이 더욱 줄었다.

 

 

 철학자, 문화비평가. 현재 영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저서 "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일상의 발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