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 앞의 철학자

 

                                                                                                 우애령

라 만차의 돈 키호테는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어느 날 길을 떠나게 된다. 욕심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한심한 종복 산초 판자를 거느리고 여위고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에 오른 그는 기사로서의 삶을 구현하려는데 일말의 두려움도 회의도 없다.

기사의 사랑에 걸맞는 구원의 여인으로 토보소 마을의 평범한 농가 여인을 정한 그는 품위 있고 귀족적이며 음악적인 이름을 그녀에게 부여한다. 그리고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 이름 ‘둘씨네아 델 토보소’의 가호를 빌며 앞으로 전진한다. 마음의 고향인 ‘구원의 여인’이 품위를 잃게 될까봐 둘씨네아 뒤에 반드시 ‘델 토보소’를 붙여서 지칭하는 돈 키호테는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나서게 된다.

여행중에 그는 그 자리에 멈추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돌아가고 있는 풍차를 이 시대 최고의 괴물로 단정하고 비틀거리는 로시난테를 몰아 일생 일대의 공격을 가한다. 그 후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우리들에게도 대충 알려져 있는 바이다.

과학문명의 꽃이고 총아인 컴퓨터를 대하는 우리 집 가장인 철학자의 태도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 키호테와 유사한 점이 있다. 책상에 앉아 펜으로 글을 써야 생각이 맥을 따라 흐르게 된다는 철학자의 학구적이며 정서적인 태도는 한때 뭇사람의 존경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는 출판사며 신문사의 사람들이 역시 손으로 글을 쓰시는 분이 좀더 깊이 있고 명료한 사고를 펼치는 경향이 있다고 조심스레 흠모의 말씀을 바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철학자는 사회 곳곳에서 이 시대의 거대한 풍차가 돌아가는 정경과 부딪치게 되었고, 그가 바라고 추구하던 여유 있고 목가적인 글쓰기는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되기 어렵게 되었다.

심지어 마지막 보루로 믿었던 동료 학자들까지도 대쪽 같은 기개를 허물고 컴퓨터로 원고를 작성하는 것을 보며 철학자의 한탄은 깊어가기만 했다.

이제 철학자는 “이메일로 보내 주십시오.”, “디스켓으로 그냥 주십시오.”, “인터넷을 찾아보시면 그 사항이 뜰 겁니다.” 이런 외계인의 언어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비분강개할 기력도 사라졌다.

아직도 펜으로 원고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 담당 기자의 얼굴에 그날 자신의 운수를 한탄하는 기색이 살짝 스쳐가며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

“정말 드문 분이시로군요.”(그 다음에 따라오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라는 말이 사라진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기록되지 못한 점은 후세 사람들을 위해 심히 애석한 일이다.)

그래도 전에는 “그냥 써서 주십시오. 저희들이 입력해서 싣겠습니다”라는 응답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 난처하면서도 예의바른 태도로 이런 응답을 덧붙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기한 내까지 이메일로 보내 주십시오.”

철학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해서 손으로 쓰니까 이메일로 보낼 수가 없다고 간곡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만면에 사교적인 미소를 지으며, “요새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없으니까, 조교한테 부탁을 하셔서 언제까지……. 그러면 교수님만 믿습니다.” 이런 결의에 찬 말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상례이다.

이 사람들은 이제 대학에서 교수가 아무런 일을 아무런 때나 시켜도 흔연히 그 영광을 받들어 기쁨에 넘친 채 일을 하는 조교가 공룡시대의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난감해진 철학자는 그런대로 컴퓨터를 배우려는 시도도 해보았으나 자기는 도저히 컴퓨터라는 시대의 괴물과 화해하기 어렵다는 독립 선언을 선포했다. 우선 그놈의 기계에 왜 내 사고를 의존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조그만 화면에 커서가 껌뻑거리는 걸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면 자꾸만 생각이 위축되어 풀려나가던 생각이 그 자리에서 멎어버린다는 학설을 발표한 것이다.

철학자가 일단 인생관에 관한 사적인 학설을 발표한 후에는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해도 그 수정이 이루어지기는 가히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컴퓨터라는 풍차가 돌아가야 밀을 빻을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방앗간에서 철학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단 말인가.

마침내 철학자는 집안의 둘씨네아며 산초 판자며 로시난테 들에게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아내와 아들, 딸들이 바로 그 구원 투수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련한 아내 둘씨네아는 성씨가 다르나 같은 호적에 입력되어 있다는 인과관계의 영향력 아래 마침내 철학자의 글을 컴퓨터로 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에 꼭 필요한 장문의 원고를 자정이 가까워 내밀 때 철학자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제부터 둘씨네아의 온갖 구박을 받아야 아침에 원고가 이메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비판은 이제 죄 없는 둘씨네아에게 향하고 있다. 한번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 원고가 못 나가는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야 철학자가 풍차와 인연을 도모할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약한 둘씨네아가 철학자에게 과학문명에 왜 적응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관해 일장 훈시를 하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 어물어물 인정에 이끌려 원고를 쳐주기 때문에 철학자가 개과천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비판의 골자이다.

모든 사람들은 총명한 인생의 견해를 지니고 있고, 이 견해에 맞지 않는 인간을 만나게 되면 일단 여장을 푼 다음에 지니고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해 공격을 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풍차 앞에 의연히 서 있는 철학자는 풍차와 화해할 의사가 없고, 줏대 없는 둘씨네아는 여전히 원고를 쳐주고 있어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사태가 개선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금 해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철학자의 오른쪽 어깨에 검을 얹고, “그대를 풍차 앞의 돈 키호테에 임명합니다”라고 선언하는 일 정도뿐일 것 같다.

 

 

심리상담가. 이화문학상 수상(2002년).

소설집 『당진 김씨』, 수상집 『사랑의 선택』, 『결혼은 결혼이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