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虛空)

 

                                                                                                 金時憲

허공이 나는 좋다. 텅 비었으니 좋고, 끝없이 터졌으니 좋고, 아무것도 없으니 좋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러나 그렇다니 어쩌랴?

 

허공은 많은 것을 그 속에 담고 있다. 해, 달, 별, 구름, 지구 등 무엇 하나 그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구만은 아무래도 실감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분명히 지구를 두 발로 밟고 다니기 때문이리라. 지구의 저쪽 편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재판까지 받은 코페르니쿠스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공처럼 해를 돌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늦게 알려졌으랴?

하늘은 커다란 화판이고 구름은 그 밑에 그려지는 동양화이다. 그것이 뭉텅뭉텅 끊어져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데도 사람이 그린 명화보다 아름답다. 화가가 그린 그림이 마을만큼 크다 해도 하늘의 동양화를 당하랴? 그것이 허공에 떠다니면서 허공을 더욱 허공답게 만들고 있다.

 

나는 어릴 때 농촌에서 자랐다. 풀과 고기와 나무와 나비와 잠자리 들 속에서 살았다. 그들을 잡고 만지고 찢고 죽이면서도 나쁜 짓인 줄 몰랐다. 더구나 허공이 밤낮 없이 위에 떠 있는데도 그것이 허공인 줄 몰랐다. 그냥 하늘이었다. 으레 거기 파란색으로 천막처럼 덮여 있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하늘이 완전히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것도 끝이 있는데 왜 끝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과학은 사실이라고 나를 믿게 만들었다.

또 언제부턴가 허공은 생명의 근원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체가 허공으로 들어갔다가 허공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어디에서 왔느냐를 따져보는 시기에 있었다. 첫째는 어머니 뱃속일 것이고, 다음은 아버지가 생각났지만 그보다 더 이전을 더듬다가 허공에 이르렀다. 나는 허공에서 온 것이었다. 나뿐인가, 온갖 것이 다 허공에서 온다는 생각을 했다.

허공은 생명의 거대한 저장고이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이지 않는 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생명 치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개도 새도 말도 곤충도 죽으면 다 허공으로 들어간다. 생명뿐인가 무생물도 닳고 작아지고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없어진다. 허공 속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봄이 되면 새싹이 뽀록뽀록 얼굴을 내미는 것은 허공의 출산 과정이다. 씨앗에서 생겨난다고 하지만 그 씨앗 이전에는 어디에 있었던가.

허공은 무진장한 조화의 소용돌이이다. 그런데도 허공인 채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말이 이해될 것도 같다.

나는 때로 나 자신이 바로 허공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허공이 내 속에서 숨쉬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깥의 허공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내 속에 있는 허공도 보이지 않는다. 나라는 육체는 100년이 못 가서 생명을 잃는다. 그때 생명은 어디 가는가. 어디 간다기보다 그냥 거기 있다. 허공 속에 있을 뿐이다.

 

광활한 허공, 무한한 허공, 표현조차 할 수 없는 허공, 그것이 곧 창조주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이해될 것도 같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허공을 곧 우주라고 말한다. 우주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냐 했을 때 허공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허공 또한 우주 안에 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허공이 우주이고 우주가 허공이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미 사람은 영원 속에 살고 있다. 허공 속에서 나와 허공과 더불어 살다가 허공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은 겨울이다. 추워서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날 햇살이 따뜻하기에 산에 오르기로 했다. 두 달만이었다. 골목길을 나와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앞에 장관이 전개되고 있었다. 풀과 덩굴과 나뭇잎이 넓은 평지에 죽음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손을 들고 항복을 당한 풍경이었다.

나는 멈춰 서서 감상에 젖었다. 죽음과 삶을 구별해 놓은 현장이었다. 여름의 푸른 바다가 백색의 바다로 변해 있었다. 형해만 남겨놓고 가버린 생명, 그것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러나 다음 순간, 그것들은 모두 허공 속에 있었다. 허공에서 나와서 허공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다음 해 봄이 되면 그 생명들은 다시 살아나온다. 필 것은 피고 뻗을 것은 뻗고 맺을 것은 맺는다. 갔다가 오고 왔다가 가는 순환이 있을 뿐이다. 우주는 살아 있는 한 덩이의 거대한 기계이다. 나는 그 기계 속에 붙어 있는 작은 부속품이다. 우주가 돌아가는 대로 따라 돌 뿐이다. 그런데도 눈은 항상 떠져 있고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 거대한 기계의 본원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눈을 높은 곳으로 들어본다. 흰구름이 이리저리 흐르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허공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허공이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나와 허공은 연결되고 있다. 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