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렁대와 동그랑쇠

 

                                                                                                    윤삼만

세월이 빠르다. 말을 꺼내기도 쑥스러운 이순의 나이에 다른 학교로 옮겼다. 역사가 꽤 오래 된 학교였다. 부임한 지 며칠 안 되어서, 본교 25회 졸업생 동창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들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가 싶어 졸업대장을 뒤져보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희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었다.

동창회에 갔다. 음식점 2층 넓은 방엔 학창의 홍안에 주름이 패이고, 머리에 서리가 희끗이 내려앉은 사람들이 스무나무 명이나 모여 있었다. 건강 점수는 잘 받은 사람들이다. 무거운 세월에 억눌려 받은 이마의 높은 계급장은 단풍이 다 지나간 뒤에도 풍성하고 고결하게 피어, 가을을 어우르는 억새꽃을 보는 것 같다.

“본래, 인생은 두 갑甲이다. 환갑還甲은 기본이고 영로零老이다. 고희가 청로靑老요 여든은 장로壯老다. 아흔은 백로白老이고 백 살이 만수萬壽이다. 그래서 만수무강하옵소서 라는 말이 생겼다.”

두 갑까지는 몰라도 만수까지는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인사말을 했더니, 맞다 맞어!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고, 큰 소리로 허허어! 웃는 사람도 있었다.

어릴 적, 나는 굴렁쇠를 굴렸다. 처음엔 동그랑쇠가 몇 발짝도 못 가서 마구 주저앉았다. 수십 번을 그랬다. 넘어질듯 비틀거리다가 마당 한 바퀴를 돌았다. 날 것 같았다. 굴렁쇠를 따라 골목을 신나게 달렸다. 동무들이 손뼉을 쳤다. 나와 굴렁쇠는 하나되어 날마다 바빴다.

환한 달밤에 조무래기들과 참외 서리를 할 때는 내가 앞장 섰다. 골목에서 힘세다고 우쭐대거나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놈들을 혼내 주어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으쓱대기도 했었다.

제주도 훈련소 안은 갓 깬 노란 병아리처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주먹이 판을 쳤다. 나는 향도嚮導 대리였다. 어느 날, 우리 내무반에서 모포 4장이 없어졌다. 돈 없는 훈련병들이라 부득이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애들 것을 훔칠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모포 훔칠 작전을 세웠다. 내가 앞장 섰다. 훔쳐온 모포가 7장이나 되었다. 남은 3장이 문제였다. 되갖다놓기는 더 어려웠다. 고구마와 바꿨다. 배고픈 우리에겐 꿀맛이었다. 갓 입소하여 졸지에 모포 7장을 잃어버린 그들은 얼마나 당황해 했을까. 그러나 그땐 탈 없었던 것만 다행해 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세미나에 가면 앞자리에 앉았다. 낯선 사람들과도 의논하고, 밤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일을 처리할 때는 지난날 써먹었던 것은 버리고, 색깔 있는 것을 찾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코브라처럼 고개를 쳐들어 날쌔게 일을 했다. 길들여져 있는 일에서는 벗어나려고 애쓰며 담금질도 아끼지 않았다. 친구들과 테니스를 칠 때면 언제나 손발이 척척 맞았다. 너와 나는 지칠 줄 몰랐었다.

네가 피곤해 할 때도 많았다. 바쁜 나날에 더 자고 싶어도 출근 시간에 쫓기어 일어나라 졸라댔고, 일요일 편히 쉬고 싶어도 등산을 강요하기도 했다. 내가 글을 쓸 때 너는 빤이 보고 있었다. 원고를 줄줄 못 쓰고 생각에 잠기거나 원고지를 구겨서 버리면 되레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문득 정년이라는 녀석이 배실거리며 등을 떠밀었다. 퇴임한 지 서너 해가 지난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4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아침이면 바쁘게 챙겨 나가고, 저녁 노을과 함께 돌아오던 버릇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책이나 신문을 보면 머리가 띵하다. 작은 글자들은 기어가는 개미로 꿈틀거리고 큰 글자만 희미하게 보인다. 글자를 알아보려고 애써 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돋보기를 맞추었다. 그것도 쓰고 있으면 흐려지거나 겹글자로 보인다. 아내는 돋보기로 쓴 붓글씨를 보고 야위어 훌쭉이 같다고 한다. 바르게 볼 수도 쓸 수도 없으니 인생은 비뚤거리는 곡선의 연속선 상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싱싱한 청엽은 못 되어도 젖은 낙엽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너의 편안함 없이는 나의 즐거움이 없다. 보람을 찾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꿈이 없는 세월엔 해가 빨리 지고, 즐거움이 있는 곳엔 시간이 머문다. 자기가 하는 일에 돈이 생겨도 좋고, 안 생겨도 좋고, 써도 즐거우면 정열은 절로 솟는다.

염치없이 빠른 놈이 세월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데, 내 영원한 반쪽은 어글어글 낡았다. 무릎이 시큰거린다. 발이 천 근 같다. 평지를 걸어도 숨이 차다. 병원엘 간다. 고혈압을 평생 친구로 삼으라는 의사의 말이다. ‘자동차도 10년을 쓰면 수명이 다 된다는데, 70년이 넘도록 호되게 부려먹었으니 어디 잘 나가겠는가’ 하고 위로해 보지만, 돌이킬 수 없으니 딱하고 안타깝다.

붓 한 자루, 원고지 한 장 들고 진달래, 짙푸른 잎새, 불타는 단풍을 감돌아 굴렁쇠를 굴리며 아름다운 눈꽃 터널을 지나간다.

 

 

전 사천초등학교 교장. 경남 서예대전 초대작가.

<계간 수필>로 등단(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