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시인의 마음

 

                                                                                               김애자

절기의 변화는 날짐승이 먼저 안다. 양지 쪽에선 어린 새싹이 묵은 풀잎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지만, 그건 겨우내 어미뿌리에서 피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향인 앞산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고, 가랑잎 속에 박힌 멍든 얼음도 그대로 인 것으로 보면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이른 편이다. 한데 목탁새는 어떻게 봄이 오는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뒷산에 와서 울고 있다. 그것도 미명의 시간에만 운다. 봄의 전령이란 쇠종달이보다도 먼저 와서 울고 있다. 그렇게 초춘初春에 와서 울다가 진달래가 지고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다. 훌쩍 떠났다고는 하지만, 사실 나는 그 새의 울음소리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정말로 새가 떠난 것인지, 산란을 하기 위해 어디에서 은신중인지조차 모른다. 동틀녘에 뒷산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만 울고 있어서, 까치발을 하고 목을 빼봐도 도저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새의 울음소리 중에서 가장 애절한 성음을 지녔는데도 말이다.

그 새 울음을 처음 들은 것은 태백산 줄기를 잡고 들어선 구학산 암자에서다. 몸이 아파서 한 해 봄을 피접避接차 보내고 있을 때에, 새벽 예불 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새가 울었다. 법당 뒤거나 삼성각 옆에서만 울었는데, 그 청음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키 어려웠다. 어찌 들으면 단소의 끝음절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떨리는 숨결로 부는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였다. 가슴 설레게 하는 뻐꾸기라든가, 깊은 심연에 서리서리 맺힌 한이 치고 올라와 도저히 토해 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밤새도록 어두운 골짜기를 넘나들며 질펀하게 울어 쌓는 소쩍새와는 전혀 다르다. 마치 눈꺼풀을 면도날에 베인 것 같이 온몸의 세포들이 경련을 일으키도록 애저린 성음이었다.

새벽마다 스물한 살 처녀의 앙가슴을 자지러지게 하던 그 새의 울음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이 산골로 이사오고 난 이듬해 봄이었다. 40여 년 만에 푸르스름한 서기를 헤치고 산의 윤곽이 서서히 깨어날 무렵에,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애저린 울음을, 그것도 이불 속에서 꿈결처럼 들었던 것이다. “아! 목탁새가 운다.” 순간 기억의 저편에서 잠자고 있던 새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출렁, 감성의 물살을 일으켰다.

그 새는 어느 행자승의 넋이라 했다. 목탁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공양간에서 심부름만 하다가 요절한 것이 원통해서 저렇게 새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귓불이 빨갛게 언 행자승이 서슬 퍼런 노승의 활喝 같은 꾸지람에 자라목을 하였을 그가, 어쩌자고 여기에 와서 우는지 모르겠다. 누구를 깨워 목탁을 치며 도량을 돌라고 저렇게 와서 우는가 모르겠다. 청신한 샐녘에 면도날 같은 울음으로 던지는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어찌해야 좋을지 내 몸속의 세포들이 또 한 번 자지러진다.

실지로 나는 목탁새의 본명을 모른다. 절간에서 스님들이나 공양주들이 목탁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죽은 행자승의 넋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듣는 이들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지어놓은 설화에 불과하다. 그 새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싶어 조류도감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울음이 비슷한 의성어를 지닌 새는 없었다. 혹시 휘파람새가 아닐까 해서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지만, 호오, 호케꼬 라고 적혀 있어 내가 들은 소리와는 딴판이다. 게다가 여름 철새라고 하였으니, 초봄에 잠깐 와서 울고 가는 그 새와는 맞는 점이 한 가지도 없었다. 해서 지금까지 목탁새로 불렀던 것이다.

산골로 들어온 후로는 숱한 종류의 새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다. 늦잠을 자고 싶어 게으름이라도 부려볼 양이면 창 밖에서 들려오는 때까치와 곤줄박이와 참새들의 등살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참새 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당가 다복솔 밑이나 잔디밭으로 날아와선 말똥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웃음을 터트린다는 여학생들만치나 재잘거린다. 누가 참새가 아니랄까봐 꼭 그렇게 티를 내는 놈들이다. 매무새 깔밋한 박새나 동고비도 자주 오지만, 고것들은 데크 난간에 올라앉아 꽁지 깃을 까불거리다간 이내 허공을 차고 날아갈 뿐 양가집 규수처럼 소리를 아낀다.

M`선생은 입만 벙긋하면 얼레에 감긴 연줄처럼 시가 술술 풀려 나온다. 지난 겨울에는 그분에게서 얼레에 감긴 연줄 한 토막을 얻어왔다.

 

‘일 없이 울고 우는, 소리 좋은 새야(無事啼啼聲好鳥)

 어찌하여 해마다 이 나뭇가지에 와서 우느뇨(爾何年年來此枝)

 강산의 다 적막함을 아까워하여(但惜江山多寂寞)

 소리소리 울어 나무 가지가지마다 보내노라(聲聲啼送樹枝枝).’

 

나는 이 시를 놓고 근 보름간을, 강산의 적막함을 아까워하여 나무 가지가지마다 울음을 보내는 새를 찾아 헤매었다. 어떤 새일까? 어떤 새이기에 강산의 적막함을 아까워할 줄 아는가.

목청이 청아하기는 꾀꼬리를 따를 새가 없다. 황금빛 깃털에 목소리마저 맑고 아름답다. 오죽하면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던 유리왕의 발길을 잡았을까. 하지만은 꾀꼬리는 아니다. 신록이 눈부신 나뭇가지에 앉아 우는 새가 어찌 적막함을 아까워할 줄 알겠는가. 그렇다고 밀화부리도 아니다. 녀석도 꾀꼬리만큼 멋진 깃털에 고운 목청을 지니고 있지만, 뻐꾸기처럼 듣는 이의 심정을 달뜨게 만든다.

그럼 유리딱새일까. 마른 나뭇가지들의 음영이 어느 때보다 선명한 겨울 산에서, 그것도 골 첩첩한 산중에서만 우는 몸집도 작은 유리딱새일까? 하지만 그도 아니다. 겨울 산이 아무리 적막하다 할지라도 바람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설령 잠시 적막했다가도 곧바로 바람이 일거나 나무에 쌓인 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후드득 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담, 그 새는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마음이 하도 고적하여 나무 가지가지마다 울음을 보내고, 이름 석 자 남기는 것도 번거로워 슬쩍 시詩 뒤로 숨었던 것이다.

목탁새가 운다. 내 눈꺼풀에 면도날을 들이대는 저기 저 울음 속에 이름 모를 시인의 마음이 숨어 있다.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91년).

수필집 『달의 序曲』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