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실명 윤예선

 

                                                                                                  이난호

엊그제도 그를 만나고 왔다.

그 여자 윤예선은 마흔여덟 살 농촌 아낙이다. 그에게는 진종일 치마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치매증인 시어머니와 술이 좀 과한 남편과 입대한 아들과 여고 삼 년생 딸이 있다. 그 외에 거두어야 할 이십 여 마리의 각종 가축과 이천 평 남짓한 전답이 있고, 자그마한 밤 동산도 있다. 그 여자 윤예선은 내 손아래 동서다.

치매로 빠져든 지 삼 년, 이제 구사할 수 있는 단어라고는 ‘엄마 밥 줘, 엄마 맛있다, 엄마 어디 가지 마’ 등 고작 대여섯 개 안팎인 여든다섯 된 시어머니는 가끔 찾아뵙는 맏아들, 맏며느리를 잊은 지 오래다. 얼마 전 까지는 그래도 우리 내외가 손을 내밀며 “엄니, 저 왔어요” 하면 “우쩐 일여?” 하고 잠깐이나마 양 손을 그러잡는 시늉을 하셨는데, 지금은 당신 어깨를 싸쥐고 흔들어도 천연스런 먼 산 바라기, 세 살짜리 아이로 돌아가 있다.

동서가 어머님을 목욕시키거나 억지 걸음마를 시킬 때는 주위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않고 꼭 말썽꾼 어린애를 다루듯, 어투도 손놀림도 거칠고 모질다. “엄니, 똥 좀 먹지 말어” 하며 손가락을 넣어 어머니 입을 마구 후벼대거나, “엄니, 걸음마 안 하면 금방 앉은뱅이 된단 말여” 하면서 기어이 노인의 어깻죽지를 꺼올려 몇 발작 걸음마를 시킬 땐 거의 가혹해 보인다. 이어서 동서는 수세미로 방바닥 오물을 제거하고 젖은 걸레로 닦고 마른걸레로 닦고 방향제를 뿌린 후 어머님을 새 이불로 둥둥 말아 앉히고는 그 앞에 그득한 밥그릇을 놓는다. 어머니는 동서가 떠 넣어드리는 밥숟갈을 받아 삼키는 틈틈이 “엄마, 어디 가지 마” 연발한다. 동서는 짐짓 볼멘소리로, “엄니 똥 빨래는 누가 하고 농사는 누가 짓느냐”고 역시 반말투로 대꾸한다.

태생 말투가 무뚝뚝한데다 억양도 꾸밀 줄 몰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나는 동서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뜨끔 한다. 저게 혹 내게 하는 시위는 아닐까. 동서는 이십 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셔오고 있는 것이다. 동서는 어떤 사람인가.

동네 사람 하나가, 노인의 식탐이 정상이 아니고 배설에 분별력도 없으니 식사 양을 좀 줄이면 빨래 품을 덜지 않겠냐고 동서에게 귀띔했더니, 대뜸, “난 그렇게는 못 해유”라고 잘라버리더라고 했다. 동서는 또, “아들 셋이 시어머니를 번갈아 모시면 어떻겠냐”고 꼬드기니까, “엄니가 무슨 물건이간디. 이리 돌리구 저리 돌리게” 하곤 푹 웃음을 터뜨리더라고 했다. 동서가 어머님을 공처럼 이리저리 굴리는 연상을 하고 웃음을 터뜨렸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찧고 까부르는 동네 사람들이 가소로워서 웃었건, 나는 동서가 웃었다는 말에 왜 콧마루가 시큰했는지 모른다.

동서는 좀 무표정하긴 해도 팍팍하거나 축 처진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손윗 동서인 내가 말을 재밌게 한다고 곧잘 깔깔대지만, 그건 그와 내가 유머 감각에서 궁합이 맞아서라기보다는 언제 봐도 편한 그의 얼굴을 대하면 덩달아 이쪽 마음이 풀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가 실로 맹랑한 질문을 주절거리며 그의 일터까지 따라붙는 걸 아주 좋아한다. 밭 흙을 헤집어 보이며 “퇴비를 많이 먹은 땅은 요렇게 포실거려서 작물을 어미처럼 품어 안는다”고 말할 때는 어느 환경운동가의 그것보다 힘지게 들렸다. 내가 서울서 조금씩 모아가는 음식물 쓰레기를 달게 받으며, “빡빡한 가공 사료만 먹던 가축들이 구정물 맛을 보면 좋아서 환장한다”고 말하면 나는 절로 다음 번엔 더 많이 모아오리라 결심하게 된다.

농사 지은 야채를 읍내에 내다 팔 때도 동서가 제일 먼저 손을 턴다고 했다. 그렇게 낯 익힌 읍내 여인들에게 올해엔 아예 배추를 절여 씻어다 팔아 포기 당 몇백 원씩 더 벌었다며 자랑하는데는 가슴이 짠해져서, 혹 읍내 젊은 여자들이 까탈을 피워 이쪽 비위를 거슬린 적이 없었냐고 짐짓 편들어 줄 것처럼 퉁겼더니 그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하고 가볍게 넘겨버린다.

언젠가 그가 설거지를 하면서 몇 마디 했다.

“형님이 어머니 못 모신다고 너무 주눅들 거 없다. 나는 그냥 어머니 하고 함께 사는 거지. 이건 ‘모시는’ 게(소리나 꽥꽥 지르고) 아니다. 만약 형님이 시골에서 살았다면 지금 나만큼 못할 건가. 무엇보다 어머니는 기왕 시골에서 사셨으니 시골에서 돌아가게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어머님이 건강하실 때 어쩌다 서울에 오시면 진종일 아파트 베란다 창살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세상에나, 사람이 공중에 둥둥 떠서 사는구나” 하며 한숨 쉬셨다. 그런 어머님의 정서를 기화로 나는 끝내 그분과의 동거를 모면했으면 하고 은근히 희망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서의 깊은 속내와 타고난 포용성에 기대어 어물쩍 몸 짐을 떠넘기고 그저 가끔씩 의무처럼 마음 짐이나 지려는 얄팍한 잔꾀를 부렸을 수도 있다. 그런 나를 동서가 되레 다독거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주변 없는 어투에 숨겨진 무구한 마음이 가슴을 눌러왔다. 나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한데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노상 푼푼하고 어른스럽고 어찌 보면 도통한 듯 나를 질리게 하는 그를 몇 번은 내가 내려다보며 느긋이 웃었던 적이 있다. 그가 껄렁한 소년처럼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가죽 점퍼를 펄렁거리며 오토바이를 몰고 내달릴 때 나는 뭔가 벅차서 주먹으로 그의 뒷등이라도 세게 쳐주며, “싱싱한 것” 말하고 싶었다. 또 한 번은 그가 운전면허 실기시험에서 불합격하고 돌아와 분하고 부끄러워서 하루 종일 울었다며 깐엔 약점이라고 펴 보일 때였다. ‘너도 사람이었네?’ 그 말을 삼키고 나는 그의 팔뚝을 야물게 꼬집어 줬다. 얼마 전에는 막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내게로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형님, 호연 아빠 보고 술 좀 줄이라구 해줘유. 형님 말은 잘 들은께” 하고 쑥스러운 듯 씩 웃었는데, 왠지 그만 목이 메어와서 나는 고개만 끄덕하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와 시동생 앞으로 긴 편지를 썼다. 그간 차마 낯 간지러워 동서 면전에서 못했던 내 속을 털어보이느라 정작 술 얘기는 편지 말미에 겨우 몇 자로 끼워졌다.

그 여자 윤예선은 지금도 충남 당진군 당진읍 채운리 80번지에 실재한다.

 

 

<계간 수필>로 등단(2001년).

수필집 『분홍 양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