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한원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치매로 어두운 정신이, 봄날 쪽방 문틈으로 햇살이 들어오듯 조금 밝아지면, 벽에 기대어 하얗게 쪼그려앉아서는 지나간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며 숙부며 내 생모의 이야기들.

열여섯의 나이에 열네 살 남편에게 시집오기 전, 큰 맘을 잡수신 할머니의 아버지 어머니에 의해 친척이 사는 바닷가로, 당신 일생에 하루뿐인 휴가를 얻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에서만 살았던 할머니께 바다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처음 딛는 모래의 힘든 걸음걸이. 자기를 내버려두고 이리저리 뛰는 바닷가 소녀들. 죽어 바다로 밀려온 젊은 남자 그리고 할머니께서 왜 새우를 드시지 않으시는지, 또 우리가 새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는지, 몇 번을 들었지만 할머니는 다시 말을 계속 하십니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감춰두었던 가족의 어두운 역사들. 일본 경찰복을 입었던 할아버지. 피난 그리고 할머니의 어린 날.

할머니는 옛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어린 날, 그 기억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붙드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뜻과 다르게 생의 불꽃이 마구 사그라들어 이제 붉은 재로만 남고, 그 재마저 곧 사그라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막내 사위의 손에 이끌려 관장을 하고 돌아온 날, 외손주 손을 붙들어 길고 더러운 손톱 발톱을 깎고, 입이 한 발 나온 손녀를 욕지거리로 잡아끌어 순백의 머리칼도 곱게 빗고는, 여덟 살, 열두 살, 그 어린 시절의 당신 이야기를 하십니다. 탈색이 되고 힘이 빠진 눈도, 잘 닦은 오닉스처럼 반짝였고, 햇빛에 바랜 복사지처럼 부옇고 갈색 검버섯이 여기저기 박힌, 구겨질 대로 구겨진 피부도 바람 잔뜩 든 고무공처럼 탱탱했고, 마늘 뿌리처럼 푸석푸석하고 마른 머리칼도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자르르 흘렀던 그때. 절대 다시는 돌아갈 수 없고 감히 그럴 꿈도 꾸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만은, 할머니 스스로의 역사만은 잃어버리지 않게 아득한 옛이야기를 꺼내 전해 주십니다.

저승 밥을 먹느라, ‘할미를 굶겨 죽인다’고 어린애처럼 조르던 할머니는 허겁지겁 국물을 흘리며 갈비탕을 입에 밀어넣으시고는 다시 벽에 기대어 쪼그려앉아, ‘장호가 태어났을 때’ 다시 입을 여십니다. 난 할머니의 이야기가 겁이 납니다. 가끔씩 내가 모르던 비밀스런 가족의 역사가 튀어나와 나를 당황케도 하지만, 저 이야기들이 다 나오고 나면 할머니께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냥 쪼그라들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되고, 한 번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되물으면, 할머니는 힘들게 힘들게 생각해 내려 하시다가 멈춥니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과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언제더라?’ 생각해 내려던 할머니가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리십니다. 자리에 눕혀드리려 하면, 작은 할머니의 몸이 허깨비처럼 가볍습니다. 할머니의 기억이 많이 빠져 나갔습니다.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얼마 없습니다. 할머니의 기억을 도와줄 친구도 가족도 다아 사라졌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끓여 통에 더운 물을 받아 손자, 손녀들을 목욕시키던 것, 할머니께서 잘 담그시던 매운 수정과, 가자미 식혜를 만드는 법은 ‘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까지 하얗게 지워졌습니다.

이 땅의 모든 할머니들이 그랬듯, 생애 단 한 번도 화려해 보지 못했던 내 할머니. 왜인들의 혹독한 지배와 제 살을 뜯어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슬픔과 굶주림으로 지쳤던 그 속에서 비명을 지르듯, 싸움을 하듯 자식들과 손주들을 길렀던 할머니. 할머니에겐 길고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다시 옛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당신을 떠나려는 기억을, 삶을 붙들려는 안타까운 저항입니다. 그러나 할머니 스스로가 가진 기억, 그 역사가 사라집니다. 할머니가 숯불처럼 사그라집니다.

 

 

<계간 수필>로 등단. 현재 민중서림에 근무.

저서 『감골에서 온 편지』, 『불임의 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