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회 추천>

 

 어머니의 항아리

 

                                                                                                 이정하

촉석루 뒷 담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 그 아래 키 낮은 민들레가 몸을 흔든다. 혼들이 하늘로 날아간다. 친구의 가게 앞에 선 돌부처는 육중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게의 나무 문살 너머로 전에 없던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구리가 약간 바드름한 게 작은 물동이를 닮았다. 마루에 내다 놓고 먼지를 닦는다. 오지 살결이 볕에 잘 그을린 여인의 피부처럼 곱다. 긴 옷고름이 흘러내리듯, 줄무늬가 허리를 감았다. 두들겨 본다. 소리가 그윽하다. 집에 갖다 놓고 독 안에 신문지로 불을 놓았다. 어머니는 짚불로 독 안을 홰두르곤 했다. 깨끗이 씻어, 맥반석을 깔고 물을 받았다. 서양식 주방에 질항아리 하나, 진한 회갈색의 곡선에 흐르는 불빛이 마치 안개 끼인 달밤 같았다. 조롱박을 하나 띄웠더니 머언 산골 냄새가 난다.

여름, 가뭄이 왔다. 취수장의 수질이 갈수록 곤두박질친다는 보도가 연일이다. 진주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걱정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정수기를 들여왔다. 항아리는 잡곡을 담는 채독이 되었다. 겨울이 길목에 설 무렵, 아랫집에서 어른 주먹만한 단단한 풋감을 보내왔다. 항아리를 베란다 그늘에 앉히고 감을 담았다. 삼동이 깊어지면서 감은 바알갛게 익었고, 홍시가 가족들의 단 혀 끝에서 녹는 동안 항아리는 텅 비었다. 겨울이 가고 샘바람이 불고, 나의 게으른 베란다에 항아리는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민들레가 피었다. 봄은 베란다를 더욱 퇴색시켰다. 항아리에는 지난 겨울의 홍시 자국이 그대로 딱지 져 있었다. 항아리를 부셨다. 물이라도 채워둘 심산이었다. 물을 붓다가 무심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요를 잉태하는 작은 파문 사이로 그림자가 현상되었다. 얼굴이… 어머니가 나를 보고 있지 않는가.

통학 기차를 타고 집에 온다. 나는 마지막 손님처럼 혼자 저녁을 먹는다. 어머니는 내 밥상머리에 앉을 염도 하지 않는다. 늘 소외된 것 같아서 서럽다. 밤 장독대, 나는 일부러 바가지 물을 놋쇠 대야에 주루룩 쏟는다. 물 소리, 쇳 소리, 대야 부딪는 소리, 잠자던 세간들이 다 일어난다. 내 밥상 설거지를 마치고 어머니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따라 오신다. “오늘은 좀 일찍 자거라?” 듣는 둥 마는 둥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내 방문을 닫아버린다. 많은 형제 속에서 내게까지 좀처럼 돌아오지 않던 어머니의 손길, 그 그리움이 울렁였다.

나는 물을 채우다 말고 항아리 옆에 퍼지러 앉아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이가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생이 되는 동안 나는 아이의 방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성거렸던가.

나는 늘 허기에 허덕인다. 그래서 혼자 바쁘다. 스스로를 세상 따라 허물어뜨리며, 욕망이라는 풀무질로 나를 두들긴다. 한없이 팽창하는 울타리를 만들어 나만의 영토를 수북히 쟁이려 애를 쓴다. 허옇게 간을 뿜는 간장 독 하나 베란다에 놔놓고, 그래도 나는 간장을 담가 먹는다고 친구들에게 흰소리를 친다. 그러고 나서는 순전히 허기 때문이라고, 내가 나에게 변명을 한다.

어머니는 크고 작은 독 단지들을 가꾸었다. 장도 짐치도 목에 차게 담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은 비워놔야 한다고, 빈 만큼 포옹의 품이 넓어진다고 했다. 그 품이 웃음을 보듬어 감을 익게 하고 김치도 간장도 달게 한다. 생명의 씨를 심고 맛과 향을 함양한 인격을 배양한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게 한다. 그러면서도 소유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품에서 하나 둘 떠나가도 가는 이를 붙잡지 않는다. 그게 순리이다.

어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던 것이다. 오고 가는 것이나 들고 남이 자유롭도록. 그게 어머니의 품임을 나는 몰랐다.

항아리는 불변의 울타리를 치고 자기의 영역을 굳게 지킨다. 차라리 깨어질지언정 구겨지는 법이 없다. 배가 고파도 오그라들지 않고 탐하여 변신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배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도 항아리는 비지 않는다.

새 생명의 홀씨가 날아가고 있다. 하하, 도시의 베란다에 혼자 남겨진 텅 빈 항아리가 웃는다. 혼이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입이 째지게 웃는다. 그때 푸른 하늘이 내려와 빈 항아리 안에 들어앉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