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경기

 

  

                                                                                            許世旭

 

 골목마다 라일락 향기가 한창이다.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타고 라일락은 시나브로 번져서 저 수심 밑으로 가라앉은 추억들을 일으켜 세운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선 국제여자 역전경기를 중계하는 흥분된 목소리. 저만큼 푸릇푸릇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쫑긋쫑긋 입질하는데 살풋 가랑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늘씬한 건각들이 피아노 건반 소릴 내고 있다.

버드나무 가지 그 포물선 따라 한적한 보도가 슬쩍 구비 도는데 머얼리 배춧빛 비옷 입은 소녀가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한참 적막이 흐르자 울긋불긋 선도차가 물방개처럼 앞장을 서더니만 밀면 자빠질 듯 가는 다리, 가는 허리의 파아란 눈이 팬티에 잔뜩 바람을 품고 누우런 여치처럼 껑충껑충 달려왔다.

그때 전군全群도로는 가장 멋들어진 신작로였다. 장장 백 리를 뻗은 길이 호남의 곡창 그 가슴 복판을 뚫고 지나갔다. 그 가상으로 훨훨 꽃비 날리던 벚꽃나무 아니면 하늘을 뚫는 포플러였었다.

우리는 해마다 봄이면 역전경기를 기다렸다. 그날이면 수업을 전폐하고 꿈길처럼 널따란 전군도로 양 켠에 도열해서 새 떼처럼 조잘거리다가 멀리서 선수가 시야에 들어올 때부터 도로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멀리 하얀 깃발을 단 지프차가 달려오고, 그 뒤를 따라 선수의 어깨띠가 펄럭였다. 우리 학교 선수가 교체점에 다가올 때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선수도 선수려니와 우리들의 목청도 쇠기 직전이었었다. 누구나 신작로로 뛰어들어 우리들 선수의 등짝을 밀고팠었다. 가까스로 어깨띠를 건네주면 새 선수는 팔딱팔딱 쏘가리의 힘이었다. 그리고 박수의 물결 속에 미끄러지듯 전진할 때 듬뿍 바람을 머금은 하얀 팬티와 파드닥거리는 어깨띠는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남아 있었다. 가다가 쓰러질지언정 나도 한 번 누구로부터 그 어깨띠를 건네 받고 싶었었다.

 

몇 해 전, 나는 겨울마다 대만의 중앙연구원 문학연구소를 찾는 철새였었다. 12월, 겨울방학이면 가서 이듬해 2월 말쯤 귀국하는 그런 철새였었다. 연거푸 3년을 그랬었다. 그곳의 환경이나 풍부한 장서는 내 저작의 산실이 될 만했다. 더구나 나를 초청한 소장은 나와 대학원 동기동창이었다.

세 번째 겨울을 나러 도착하던 밤이었다. 소장은 나를 늦도록 기다리다가 내 숙소를 안내하러 앞장을 섰다. 간 곳은 여느 해나 마찬가지로 채원배蔡元培 기념관이었다. 바로 중국 대륙에서 중앙연구원 창립 당시 원장을 지냈던 그분을 기념해서 지은 건물이었다. 소장이 필경 나를 안내한 것은 그 건물을 개축한데다 나에게 좋은 방을 안배했노라는 선심도 보이기 위해서였다.

채원배 기념관은 언덕 위에 세운 목조 2층 건물이었다. 1층은 소강당에다 사무실·응접실·자료실 등이요, 2층은 단신 연구원의 숙소에다 화장실·목욕실 등이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1층 소강당을 연구원 숙소로 개조한 것으로 이 열 횡대로 나눈 뒤, 가운데 복도 양 켠으로 촘촘하게 칸을 막았다.

소장은 새로 개축한 아래층 숙소 그 마지막 방으로 인도했다. 햇볕이 잘 들고 한갓진 게 좋다고 말하면서 내 코앞에다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미소를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꽂고 찰그럭 소릴 냈다.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행장을 놓고 애써 한숨을 삼키고 있는데 소장은 저녁 먹으러 가자고 서둘렀다.

소장이 자기 동창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그 방은 결코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개조하기 전, 그곳은 소강당 동남쪽 귀퉁이, 거기에는 남쪽 창이 나 있고 그 아래로 귀빈이나 연사가 앉도록 의자 몇 개가 나란히 놓였었고, 소강당 한복판 연단이 놓였던 자리로 지금 복도가 난 것이다.

벌써 40년이 넘은 1962년 2월 24일, 당시 중앙연구원장이었던 호적胡適이 여기서 원사院士 회의를 주재타가 심장마비로 졸도, 그 자리서 운명했었다. 당시 유학중이었던 나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 그분의 기호와 문학풍격까지 좋아하는 팬이었었다. 생전에 한 번 뵌 일도 있었지만 그의 빈소를 찾아 나의 중국 친구들이랑 뜨겁게 눈물을 뿌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장례를 마치고 어느 날, 나 혼자서 채원배 기념관을 찾았었다. 휘휘하게 비어 있는 소강당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어느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다가왔었다. 나는 거침없이 물었다. 혹시 호적 선생이 운명했던 곳을 아느냐고? 영감은 나를 흘깃거리다가 스스럼없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그이를 졸졸 따랐다. 그는 소강당 연단과 동남쪽에 난 창문 그 중간쯤을 손가락질하면서 여기라고 했다. 나는 거기 아무것도 없는 거무스름한 바닥을 보면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 중국 삼천년 문학사를 뒤엎어놓은 희대의 석학 그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던 곳에다.

 

소장과 그날 밤 저녁을 먹으면서도 그런 얘기는 끝내 꺼내질 않았다. 그럼에도 그날 밤부터 꿈자리는 어수선했다. 눈을 떠 사방을 휘둘러보면 내 누운 자리가 필시 그분의 절명했던 곳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일어나 혼자 끙끙 침대를 옮겨 남창에 바짝 붙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이때부터 눈을 뜨면 그곳이 한눈에 들어왔었다. 그러면 다시 돌아눕기도 했었다.

이렇게 두 달 남짓 밤마다 잠을 설쳤다. 그 절정은 2월 23일 밤이었다. 말하자면 호적 선생 기일의 입재入齋날이었다. 내가 비록 그의 후손이 아니라서 재계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 그 망혼이 중앙연구원 건너편에 있는 그의 유택幽宅에서 일어나 환고향할 때, 적어도 그의 마지막 밟았던 땅을 둘러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밤은 뜬눈으로 샜고, 용케 ‘호적 선생께 부치는 편지’라는 시 한 편을 썼다.

이튿날, 나는 충혈된 채 연구실에 나가 앉았다. 여느 때처럼 소장과 점심을 하기로 했다. 그는 나의 충혈된 까닭을 물었다. 나는 그 동안 나 혼자 전전반측했던 세월을 꼬아바쳤다. 누워서 뒤척이며 잠못 이루던 어두운 밤을 이야기했다.

소장은 감쪽같이 몰랐노라 하면서 한마딜 붙였다.

“자네가 중앙연구원에 와서 결국 호적 선생과 역전경기를 벌인 게 아냐? 비록 시간 차는 있지만.”

내 위인이 어찌 호적의 바통을 넘겨 받으랴만 그 한마디는 내게 큰 위안이었고, 역전경기란 말은 내 귀를 번쩍 열리게 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꼭꼭 묻어두었던 소년의 꿈이 되살아난 것이다. 하얀 어깨띠를 날리면서 전군도로를 뛰고팠던 그 선수의 꿈 말이다.

 

 

<후기> 호적 기일에 쓴 시는 며칠 후 대만의 중앙일보에 발표되었고, 육필 원고는 중앙연구원 문학연구소에 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