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을 위한 송가

 

 

                                                                                                  주연아

  

나는 ‘수필쓰기’를 사랑한다. 뒤늦게 만난 중년의 애인을 사랑하듯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의 이 소중한 연인은 홀대를 받고 있다. 나는 이 부당한 대우에 대해 상당한 저항감을 느끼지만, 그런 나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것은 글을 쓰되 어떤 장르의 글을 쓰느냐는 물음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매번 어떤 정체불명의 위축감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짧게 ‘수필’이라 대답한다. 그리고는 퍼뜩 상대방의 얼굴에 번지는 엷은 실망의 빛을 감지하고, 혼자 곤혹스러워한다. 또 수필도 좋지만 소설이나 시를 써 보란 친절한(?) 권유에,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그 비겁함에 대한 자학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긍정적인 반항을 하기로 하였다. 다시 말해 이 명백한 부조리로 인한 괴로움을 축복으로 바꾸어놓기로 한 것이다. ‘사랑을 하는 것은 받는 것보다 행복하느니라’라는 명구를 떠올리며, 온당한 대접에 대한 대답 없는 메아리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내 귀한 연인을 더욱더 치열히 사랑할 것이란 작정을 한 것이다.

때로는 사는 게 몹시 쓸쓸해, 목이 메이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간절한 기도의 응답처럼 찾아와 ‘하나의 의미’가 되어준 수필… 이것엔 소설처럼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추는 장치가 없다. 허구와 현실의 명암적 대비도 당연히 없다. 뿐 아니라 시詩처럼 안개낀 우회 도로를 신비롭게 달리는, 은유의 방어기제도 역시 없다.

그러나 내 연인엔 범할 수 없는 품격이 있고 고급스러운 유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푸르도록 빛나는 그의 영혼 안에는 정직한 맨살의 육성이 스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안타깝게 사랑하는 수필은 왜 경시를 당하는 것일까. 정말이지 수필은 아무나, 쉽게, 손길 닿는 대로 써 지는 글인가.

나는 지금도 하얗게 빈 종이 앞에서 수필을 만날 때, 이제는 오래된 연인같기도 할 법한 그것 앞에 설 때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지 모른다. 이 마음은 검은 연기와 같이 서서히 나를 잠식해 오고, 머리 속의 핏줄들은 일제히 날을 세운다. 그리고 나는 그 작두 위에서 하염없이 춤을 추는 것이다. 한바탕의 춤사위를 마치고 내려서는 희열은 말로 할 수 없지만, 이 서슬 푸른 작두에 발을 베는 아픔이 끔찍하던 나는, 때로는 멀리 멀리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쓸쓸한 자유 속에 내던져져 있던 날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고독과 함몰의 순간들을 기억하면, 더 이상 이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스스로 밧줄에 묶인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도 내 경외하는 수필은 여전히 주연이 아니라 조연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 언제이던가 민족문학 작가회의 쪽의 어느 시인이 수필집의 표지를 ‘산문집’으로 명기하라고 조언하여 아연했던 적이 있었다. 가깝게 지내는 그는 수필에도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수필이야말로 뭔가 문학을 땜통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문학 전체에 내용, 즉 미학적 총체를 부여하고 급기야는 총체 자체를 미학화하는 궁극의 장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숱한 수필들 중의 많은 부분이 총체를 능가하는 땜통의 미학보다는 종이가 아까울 정도의 낙서 혹은 일기에 가깝다’며 일침을 가하였다.

진정한 수필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지 않은가. 나는 지금 정말 힘든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다. 수월한 사랑엔 묘미가 없는 것, 자고로 고통스런 사랑에 참맛이 있고, 사랑의 진수는 또 그 불가능한 결말에 있다지 않는가.

어느 봄날 신의 보속으로 축복의 꽃보라처럼 나를 방문한 수필……. 햇빛이 찬란한 날 그를 잠시 잊는다 하더라도, 비 오고 바람 불면 내가 그를 찾아가리라. 눈물나게 외로운 날, 눈물의 강 위로 노를 저어 호젓이 찾아가리라. 내 가슴 한가운데 떠 있는 수필의 섬 하나, 폭풍우가 몰아쳐도 늘 거기서 그렇게 기다려 줄 그 섬, 물어 물어 찾아간 나에게 한아름의 위로는 안기고, 돌아서는 길 위에는 꽃보라가 데불고 온 우박도 어쩌면 함박같이 쏟아지겠지.

하지만 내 아무리 밤새도록 우박을 쓸어내려 애쓴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새벽까지 천사와 씨름하는 야뽁강의 야곱이 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천사와 싸워 이겼다는 뜻)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는 야곱이 될 수는 없으리라. 내 비록 방울방울 맺히는 땀이 아니라,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로 내 연인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내 사랑은 영원한 치정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 같은 이 예감… 나는 두려움에 그만 몸을 떤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수반한 이 사랑을 즐기려 한다. 가치 있는 수필을 쓰는 것, 이것이 내 나머지 삶의 보람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한 ‘왜 하필이면 수필을 쓰는가’라는 우문에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다. 언제, 언젠가엔 수필이 문학의 위기, 아니 진지함의 위기를 극복하는 구원의 장르가 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는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일찍이 저 희랍의 피그말리온이 그의 조각에 넘치는 정열을 불어넣어 여인이 되게 하고, 그 차갑게 빛나던 대리석에서 생명의 고동이 용솟음치게 했듯이, 나도 내 넘쳐나는 연모의 정으로 수필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수필도 스스로 생명이 있는 생명체가 되어 내 곁에 머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