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

 

 

들 꽃

 

 

                                                                                           박장원

 

 굴비를 유난히 탐했던 미당이 남도 여행길에서, 부인 성화에 못 이겨 영광 법성포 선창거리에 나가 무거운 굴비 두름을 사서 둘이 비지땀을 흘리며 어싸어싸 떠메어 버스 시렁에 올려놓고는, 또 누가 들어가는가 안 들어가는가 눈독 올려 지키느라 밤의 좋은 경치도 그냥 두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언뜻 시인과 굴비라는 삶의 메타포와 현실적인 것의 소박한 옹호에서 그의 자화상을 엿보게 되었고, 수필에도 이런 멋을 담아내야 한다는 순진한 바람도 가져보았다.

29편이 실린 2003·봄호 <계간 수필>은 아쉽게도 파릇파릇 생동하는 봄기운이 희미하다. 젊은 수필가들의 작품에 눈길이 머물지 않는 것은 하나의 벽처럼 다가서고, 중견 산문가도 이런 담을 훌쩍 넘지는 못하였다. 물론 먼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봄기운도 있었다.

 

김태길의 ‘초등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

난간도 없는 봉방鳳方 다리를 운명에 대한 모종의 믿음으로 눈을 감고 앞을 향하여 용감하게 걷다가 개울바닥 돌부리에 머리를 박았다는 위험하고도 엉뚱한 추락은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하고, 빼어난 미모의 홍윤희와 은근한 관심을 보낸 김지수를 온돌방 숙직실에서 그저 꿈꾸는 기분으로 만났지만, 기지나 여유가 없어 막연한 동경이었던 ‘아는 사이’는 순박한 바람으로 사라졌다는 고백에서도 웃음이 밴다.

문학적 성공을 따지기에 성급함이 있지만, 나상裸像의 문학을 대하는 진솔한 자세에 경의를 표한다. 근엄한 철학가의 어린 추락과 선비풍 수필가의 ‘아는 사이’에 대한 자조에서 독자와의 사이는 좁혀지는 느낌이다.

 

정진권의 ‘대조법對照法 연습’

이따금 담에 앞발을 걸치고 아랫집의 개 두 마리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둥이의 구속과 언제든 날아와서는 함께 뜰을 쪼며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산비둘기 한 쌍의 자유,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는 까치의 설렘과 뜰을 쫄 때도 한번 쪼고는 상하 좌우를 두 번은 살피는 의심이 많은 참새의 연민, 밝은 날 빛 속에 남의 눈치 안 보고 살아가는 개미의 의연한 모습과 전전긍긍하며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쥐의 딱한 몰골이 대조된다.

동물을 통해 인간을 꼬집으려는 저의도 있지만, 비교 대상 설정에서 파격이 두드러져야 되는데 그것이 약하다. 까치와 참새 모두는 ‘참새목 까마귀과’로 분류된다면, 어떻게 참새와 까치의 현형顯型이 다른 것일까 하는 실험적 탐구가 우선이고, 이제는 쥐 이야기 좀 해야겠다면서 대강 짐작이 갈 것이라는 실토에서 강조의 묘미가 결여된다.

 

신달자의 ‘의자 하나가 되고 싶어요’

앉으면 행복의 중심에 든 것 같은 편안한 안식이 온몸에 배어드는 그런 의자가 갖고 싶어 “나 의자 하나를 갖고 싶어요”를 “의자 하나 되고 싶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화자에게서 의자의 편함에는 수렁과 생존이 존재한다는 메시지가 분명 설리적說理的으로 다가선다. ‘의자’의 구태의연한 ‘지위’가 아닌 ‘편함’은 곧 ‘죽음’이라는 출발에서 삶의 수렁이 과감하게 파헤쳐지고, 관습과 고정관념, 상식을 파괴하는 힘에서 전율 같은 것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싱겁게도 이정록의 주정적主情的인 ‘의자’를 통해 서로 나름으로 의자가 되어주고, 의자를 소지하는 삶이야말로 같이 살아가는 행보라며 관습과 고정관념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신춘문예의 주지적主知的인 ‘의자’에서 시 일부라 소개하였지만, 편안함도 두 발이 빠지는 것으로 보면 수렁이 아니겠는지요 하는 결론을 유도하는 편함도 결국 수렁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송규호의 ‘촉나라의 옛길’

서안西安을 출발한 열차로 새벽 4시를 구불구불 달려 종착역인 성도成都로 치달으며 역사를 돌아보고 선인을 그리워하고, 희부연 아침을 새김질하는 황소 등허리의 멧새가 이물 없다고 하고, 면양棉陽에서 인사도 없이 헤어진 친절한 젊은 부부를 안으로만 새겨 여미는 마음의 한길이라 노래한다. 여로에서 견문을 기록하고 산수경물을 묘사하는 유기游記를 통해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촉나랏길을 비록 기차를 타고 넘지만, 정을 실었기로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양 절벽이 마치 칼날 같았던 검문관도 창변窓邊에서의 파노라마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의 역량이다.

안록산의 난을 피해 장안을 떠나 성도에 와서 시성詩聖의 위치를 확보하였던 두보杜甫와 유비의 보금자리였고 제갈량의 명문 출사표가 아직도 선연한 고도를 생각한다면, 그가 애송한 시선詩仙 이백의 ‘산중문답’은 그렇게 적확한 인용도 아니고, 현종 황제와의 만남을 꿈꾸던 야망 청년에게 늘그막을 어떻게 지냈는지 하는 감상感傷은 접어야 한다.

 

우애령의 ‘풍차 앞의 철학자’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돌아가고 있는 풍차를 그 시대 최고의 괴물로 단정하는 돈키호테와 컴퓨터라는 이 시대의 괴물과 화해하기 어렵다며 독립을 선포한 남편 철학자, 마음의 고향이며 구원의 여인 둘씨네아와 성씨가 다르나 같은 호적에 입력되어 있다는 인과관계의 가련한 아내의 설정이 매끈하고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상태도 핍진하며, 클라이맥스에서 어떤 바람 앞에서도 화해할 의사가 없이 의연히 서 있는 철학자에게 가련한 아내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검을 얹어주면서 남편을 세계의 쾌남아 반열에 올려놓는 반전을 꾀하는데, 마치 노련한 검투사가 단칼에 상대방을 제압하듯이 날렵하다.

풍차 앞에서 갈등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면서도 단정한 철학자를 능멸하는 과학 산업사회를 은근히 풍자하고, 갈등과 반목의 시대에서 결국 패자 없이 모두가 승자되는 사랑의 풍차가 힘차니, 속단인지는 몰라도 이런 소품이 바람 되어 풍차를 돌려준다면 관객 없는 객석에 활기가 되지 않을까.

 

장원의의 ‘대장간’

차단기가 내려지며 강아지를 끌고 가던 할머니, 갓난애를 안은 새색시, 시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꼬마들까지 마라톤 출발선에 모여 있는 선수들처럼 서서 기차가 꼬리를 감출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는 순박한 모습이 있는 이름도 예쁜 땡땡거리 무인 건널목. 그 언저리 모래내 대장간을 지나치다 고개 숙여 안을 들여다보는 뒷모습이 아름답다.

장날 아버지를 따라 소 팔러 가다가 쇠전 옆골목 대장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던 팥죽같이 흘러내리는 빨간 쇳물이 아련하고, 보리방앗간에서 확 속을 휘젓는 어머니의 날렵한 손놀림을 담금질로 연결시키는 것이 유연도 하지만, 담금질의 기식음이 날카롭게 포착되지 않았고, 쓰다 버린 고철같이 남의 눈에 관심없거나 하찮은 일을 소재로 규정하는 수필론을 펼치는데 수긍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땡땡거리 주변의 소박한 풍경을 담담하게 펼쳐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김시헌의 ‘허공虛空’

눈을 높은 곳으로 들어본다. 흰구름이 이리저리 흐르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허공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허공이 나를 보고 있다. 그러나 나와 허공은 연결되고 있다. 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텅 비었으니, 끝없이 터졌으니, 아무것도 없으니 허공이 좋다는 무소유의 경지가 못내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허공을 이야기하면서 흥분한다. 허리 부분에서 인내심 없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이해될 것도 같다는 속내로 허공을 금세 허공으로 흩어버린다. 사유 수필의 생명은 처음부터 치밀한 구성과 냉정한 사고 그리고 번뜩이는 기지로 발자취를 남기지 말아야 하는데, 중간에서 독자에게 그것을 들키고야 만다.

‘불佛이란 석가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서, 하늘의 대기 허공을 말한다. 이를 무無라 이름 짓는다.’

혹여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이 허공의 공간은 협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수봉의 ‘빗소리’

귓속이 멍∼ 해지도록 양철 지붕을 두들기며 마치 휘모리장단으로 장구를 난타하는, 몇 개의 현絃을 손끝으로 퉁기는 것처럼 처마 끝에서 여운처럼 스러지는, 달빛 희부연 적요한 밤 처마 끝에서 고드름 타고 내리며 얼다 녹다 떨어지는, 역동을 보여주며 댓잎을 후려치는, 연인과 함께 우산을 받고 가며 듣는, 흙을 어루만지며 내일의 풍요를 속삭이는 빗소리는 이명처럼 아스라하게 웅웅거리는 태고의 소리이지만, 자연과 유리된 도시의 현대인에게는 비명과 유령처럼 웅성거리는 소음이라 아쉬워한다.

사장파詞章派의 서정과 도학파道學派의 교훈으로 과거와 현재를 예리하게 재단하지만, 빗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콘크리트처럼 굳어가고 있다는 경고에서는 공감의 폭이 좁아진다. 오히려 과감하게 아파트 숲에서 듣는 개성적인 빗소리를 예찬하였다면, 강물과 빗방울들이 오랜만의 상봉처럼 얼싸안는 감동의 소리가 되지 않았을까.

 

수필은 있는데 수필은 없다고 한다.

넓이와 깊이가 그토록 크기에 ‘무형식의 장르’로도 불리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산문이 광막하고 고적하다는 반증일 따름이며, 그러기에 수필가의 어깨가 가볍지만 않은 것이 현실이다.

수필은 다부지게 자아를 버리지도 또한 자연과 사회를 버성기지도 못하니, 지智와 정情의 대립을 지양하면서 그것을 절묘하게 일치시키는 역량이 요구된다. 또한 전통 산문과 현대 에세이의 험곡險谷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지만, 그야말로 비지땀을 흘리며 어싸어싸 앞으로 나가야만 초대받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비록 수필이 저만치 피어 있는 외로운 들꽃이라도 경이롭고 신선한 아름다움을 갖춘다면 어쩌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칠까.

무수히 반복되는 계절의 무대이건만 올 봄도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