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없는 생각

 

 

                                                                                                   정규복

  

요즘 미국의 정치사회 철학자 마크 릴라 교수의 왉克갼愎?열정(The Reckless Mind)왏?출간되어 국내 몇몇 신문의 화제에 오른 바 있다. 릴라 교수의 주제는 분별없는 열정으로 20세기의 한때를 피로 물들게 한 극에 치우친 좌우의 파시즘, 나치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양면을 들어내고, 중요 인물로 하이데거·슈미트 그리고 벤야민·코제브·푸코·데리다 등을 들어놓았다. 즉, 그들의 공통점은 남을 인정치 않는 ‘전제성專制性에 대한 열망’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전제성에 대한 열망은 겉으로는 나름대로의 깊숙한 철학을 지닌 듯하면서도 이면에는 독선적 정당성을 함유한 ‘함정’이 내포되어 있어 그들의 분별없는 열정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이상과는 달리 엉뚱한 비극의 결말에 이르게 하였다는 것으로, 그들의 전제성에 대한 열망은 우리 정신에 내재한 다양한 영을 정직하게 그리고 올곧게 들여다보는 데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20세기 한때의 철학계를 풍미하던 대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주 저서 왒맛玲?시간왏? 남겨놓은 것과는 달리, 그는 슈미트와 함께 분별없는 열정으로 히틀러의 나치를 옹호하였을 뿐더러 나치 당원으로서 유대인 학살에 일조를 하여 역사상, 철학상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흔히 학문과 정치가 밀착된 정학유착政學癒着(?)을 비꼬아 이야기되는 ‘철학자가 왕이 되려고 하면 철학과 정치가 함께 망가진다’는 말대로 특히 하이데거는 대저 왒맛玲?시간왎〉?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실천으로 2차대전 후 계속 문제가 되어 왔고, 지금도 되고 있는 데서 결국 학자는 이론의 실현이 전제가 되면서도 학자가 몸소 이론의 실천자가 되면 백발백중 실패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보겠다.

훨씬 기원전으로 소급하여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맹자孟子가 주유천하周遊天下하면서 그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천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도정치는 오랫동안 동양의 봉건정치에 규범이 되었고, 그리스의 플라톤은 그의 철학정치를 실현하려 시칠리아의 통치자 디오니소스 2세를 찾았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그의 철학정치는 서양 고전 정치의 하나가 된 것은 맹자건 플라톤이건 몸소 왕도·철학정치의 실천자가 되었다면, 아마 그들도 그들의 왕도·철학정치와 함께 패배의 잔을 마셨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우리 나라 현대 정치의 경우도 이승만 정권 이래 이어지는 박정희·전두환 군사 정권 시대에 그들의 독재정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저명한 철학자·헌법학자 및 정치학자들은 그들의 급조된 사이버 이론과 함께 ‘미네르바의 부엉이’ 신세가 된 것을 우리는 아직껏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는 초지일관 ‘학문한다’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현실정치를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뛰어드는 정치 행위나 혹은 퇴임 후 감행되는 사회봉사 못지않게 떳떳한 문화봉사가 된다는 것이다.

인류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온 지적 학문도 문화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화는 다원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주고받는 give and take ‘교접’을 통해 더욱 건강해지고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를 조직화하는 학문의 이론도 새들이 좌우의 날개로 나를 수 있듯이 좌우의 이론이 출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특히 문화의 핵을 이룬 사상은 너와 내 toi et moi가 만나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며 공존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현재 지구촌에 다시 전화戰火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미국 부시의 전체주의적 일방주의가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일차로 아프가니스탄을 폭력으로 제거한 것을 기화로 다시 이라크를 폭력으로 제거할 긴장된 순간이 우리 눈앞에 바싹 다가왔다. 이것이 성사되는 날이면, 다시 한국으로까지 불똥이 튈 가능성으로 우리 한반도는 시시각각 전율하고 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과 같이, 폭력은 폭력을 불러들여 결국 승자와 패자가 함께 공멸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미국의 일방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로서 이성과 감성, 이와 기 등이 ‘음양상승陰陽相乘’에 의해 서로 뒤섞이면서 이루어지는 그 사상은 지구촌 인간의 수만큼 많아 한없이 문화 창출의 힘을 지니고 있다.

문화는 다양한 꽃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화단과 같다. 이런 문화의 다양성을 외면한 한국의 좌우의 극을 달리는 극단주의자들은 해방 후 마르크스주의를 금과옥조로 신봉한 나머지 평화로운 학원과 마을을 살인·방화로 멍들게 한 것같이 요즘에는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친미·반공 일변도로 그들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신마르크스주의 색깔의 올가미를 덧씌우고, 외신까지도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가위질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 행위가 아닐 수가 없다.

결국 이들 일방주의자들은 이기주의로 ‘나’만을 절대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열망으로서 좌우의 특징과 공존을 파괴하는 ‘분별없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릴라 교수가 제시한 ‘인간에 내재된 다양한 영혼’은 결국 인간이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로서 시간에 따라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영물임을 감안하여 ‘나’와 우리측만을 극대화하는 절대주의·결단주의·독선주의·지역우월주의·메시아주의를 극복하여 남을 인정하고 귀를 기울이는 호혜주의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