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와 자장가

 

 

                                                                                             鄭鎬暻

  

4월 중순인데도 날씨가 변덕을 부려서 추웠다가 더웠다가 하는 통에 감기 환자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나도 몸조심을 하고 있는 중이어서 겨우내 입고 있던 두툼한 내의를 벗을까 말까 하고 고민중이었는데, 어제 저녁부터 내리던 굵은 빗줄기가 오늘 아침에는 거센 바람까지 동반하여 싱그러운 신록의 토요일 계획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뒤 창문을 울리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마치 한겨울처럼 몸을 옴츠리게 하였다.

 

이 무렵의 오동도에는 동백꽃도 거의 시들어 쓸쓸한데, 관광객들의 술 취한 유행가 가락만이 파도를 타고 장날처럼 흥청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곳의 방파제를 거닐 때면 작곡을 전공한 그 친구를 언제나 생각한다. 범패梵唄를 연구하던 친구였는데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정처 없이 떠돌다가 화장한 뼛가루를 그의 고향인 이곳 오동도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6·25를 전후 한 한동안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을 때 만나게 된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친구였는데, 그 무렵 나는 대학 재학 시절로 시를 쓴답시고 그와 자주 어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작곡을 해주겠다면서 나에게 불쑥 작사를 부탁해 왔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자장가’를 써 주었다.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기야

 달여울 은하수에 나들이 간다

 강가에 띄워 보낸 나뭇잎 배에

 꽃 소식 전해올까 맞으러 간다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기야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기야

 구름 속 너울너울 나들이 간다

 바닷가 잃어버린 비단조개를

 한 아름 치마폭에 담으러 간다

 자장자장 잘 자거라 우리 아기야.’

 

그 후 몇 세월이 흐른 뒤 서울에서 교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작곡한 가곡 10편을 모아 녹음한 테이프를 주면서 작곡 발표회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서울 실내악단의 반주로 연주하는 발표회였는데, 나의 ‘자장가’는 목관악기인 오보에의 반주로 소프라노 이인숙이 부른 것이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가적인 음색이 특징인 오보에의 선율에 실은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서툰 나의 노래말인 ‘자장가’는 감미로운 꿈속으로 이끌어 나를 조용히 잠재우고 있었다.

 

그는 이 고장에 태어난 재주꾼이었다. 그림에, 조각에 그리고 음악에 예술 분야의 만능꾼이었으며, 또한 아내를 바꾸는 데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인의 기질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떠돌이의 생활로 50대 초반의 불우한 삶을 마감했다. 예술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아니면 괴벽이라고 할까, 그의 첫번째 아내와의 이별도 알고 보면 웃고 말아버릴 하찮은 사건이었다. 신혼여행의 뱃길에서 신부가 읽고 있는 책이 저속한 주간지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하여 두 번째, 세 번째의 아내와도 예술과 세속의 불협화음에서 오는 갈등과 실망감의 고뇌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하다가 한 줌의 재로 이승을 하직했다.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 뜻하지 않은 비바람이 창문을 내리치는 깊은 밤에 나는 40년 전의 그날들을 회상하고 있다. 필요한 녹음 테이프를 찾아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뜻밖에 눈에 띈 그 친구의 가곡 테이프를 걸어 들어보았다. 새삼스런 감회에 젖어들게 하였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박인환의 ‘木馬와 淑女’ 마지막 구절이다. 우리는 어차피 속세의 한 가엾은 중생이거늘 어찌하여 그는 이들과 정을 나누지 못해 떠났는가. 하늘이 맑게 갠 어느 손 없는 날, 오동도 기슭 갯바위에 앉아 그가 작곡한 ‘자장가’를 들려주며 구천九天에 떠도는 그의 외로운 영혼을 달래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