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테발디

 

 

                                                                                            고봉진

  

나이를 먹어가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주변에서 감동적인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아온 세월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쌓여가는 것이 경험적인 지식이다 보니, 무슨 사물을 접해도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익히 알고 지냈던 것들이거나 그와 비슷한 것들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 끝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들이다.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으니 모두가 시들하다.

어쩌다가 어떤 것에 일시적으로 진한 정이 끌릴 때가 있다. 그러나 곧 닥칠 그 뒷일이 먼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어 의식적으로 그 타오르려는 감정을 죽이고 만다. 젊을 때는 해내기 쉽지 않았던 일이다. 자기 감정의 움직임에 자제력이 강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그만큼 내면세계가 삭막해졌다는 이야기겠다.

책을 읽어도 깊이 몰입하거나 감동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집안 이 구석 저 구석 여전히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 쓸쓸한 마음이 든다.

이거였던가, 저거였던가, 음악을 골라서 들어보지만 기대한 감흥은 일지 않는다. 점점 음악을 배경 음악(BGM)처럼 무심하게 틀어놓거나 듣게 되어 간다.

나날이 이렇게 덤덤해져 가는 스스로를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다 노출시키고 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입으로는 정이 헤퍼졌다.

조금이라도 맛있는 음식, 그것도 어느 대중음식점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도 ‘참으로 감동적인 맛’이라는 표현을 예사로 사용한다. 평범한 어느 악단 정기 연주회에 가서 그만그만한 음악을 접하고도, 같이 간 사람에게 표시해야 할 통과 의례 정도로 생각하고, 우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홀을 나와 헤어질 때는 ‘오늘 저녁은 참으로 행복하다’ 하고 무엇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지 정확히는 그 소속이 불분명한 말을 한다.

그러고 있는 자신을 가끔 의식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가 못마땅하고 싫은 생각이 들고 기가 죽는다.

 

젊었던 날은 왜 그렇게 턱도 없이 감동적인 것들이 온 사방에 널려 있었던지 언제나 감격하기에 몸과 마음이 분주했었다.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와의 만남도 그런 일들의 하나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종로 1가에 있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서 푸치니의 ‘라보엠(La Bohème)’을 들었다. 테발디가 미미(Mimi) 역을 맡은 것이었는데, 죽어가는 미미의 슬픈 절창에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바로 그날로부터 나는 테발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녀의 레코드와 그녀에 관한 자료를 열심히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손쉽게 그러한 것들을 수집할 수가 없었을 때였다. 그러나 내가 그 때 거처하던 작고 너저분한 단칸방의 벽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프로필 사진이 실려 있는 레코드 재킷이 몇 장 압핀으로 고정되었다. 나보다 16세나 연상인 그녀가 누나라기보다는 어머니 세대에 가까웠지만 나의 핀업 걸(pin-up girl)이 되었던 셈이다. 밤이면 그녀의 노래를 작은 포터블 전축에 걸고 듣고 또 들었다. 그때는 헤드폰이 대중화되기 전이라 밤중에는 이웃을 의식하면서 낮은 볼륨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호소력이 절절한 노래를 듣는 감흥을 혼자 가누기가 벅찼다. 그녀의 새로운 레코드를 구해서 들을 때마다 먼 지방에 가 있던 친구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녀가 노래하는 푸치니의 선율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를 전하는 긴 편지를 밤을 새워가며 쓰곤 했었다.

1960년대 후반, 그 시절의 테발디는 같은 소프라노 프리마돈나의 하나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와 언제나 비교가 되었다. 나는 칼라스를 그녀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싫어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칼라스의 레코드는 그녀의 명창으로 저 유명한 도니젯티(Donizetti)의 ‘람메르모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에서의 ‘광란의 루치아’를 명 아리아 선집에서 들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의 매부리코와 ‘앙칼진’ 목소리를 싸잡아 비난했었다.

그 뒤 어느 날 정작 내가 좋아하는 테발디가 그 목소리와 재킷의 청초한 모습에서 상상한 것과는 달리, 서양 여자치고도 거구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낙담을 했었던지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 가련한 목소리를 지닌 여자는 왜 당당한 몸매를 지니면 안 되는지 그 까닭을 나는 지금도 잘 모른다.

테발디는 1970년대 초 화려한 오페라 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기까지 팬들을 위해 세계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리사이틀도 자주 가졌다지만, 오랜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대 위에 선 그녀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테발디에 대한 정열은 오래 지속이 되었고, 지금도 가끔 오디오에서 그녀의 지난 날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설렌다.

 

그러나 묘한 것은, 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그 정감 넘치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심정이 드는 점이다. 젊음에는 엄청난 고뇌(Leiden) 즉 슬픔이 따른다. 그 지긋지긋한 과정을 다시 밟겠다는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은 기력이 쇠약해서라기보다는 세상을 너무 많이 알게 된 탓일 것이다. 어느덧 지나온 길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돌아보며 다만 그 많은 날들의 일들을 그리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