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물과 마스크

 

 

                                                                                                 오정순

 

 손톱을 잘못 건드려 방어벽이 무너졌다. 세균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득신득신, 손마디가 벌겋게 부어올라 누가 내 곁을 지나기만 하여도 몸이 움찔대고 왼팔 전체가 묵직해진다. 손톱 빼는 일 생길까 두려워 환부를 쨌다.

간호사는 약을 주면서 끓인 물을 미지근하게 하여 환부를 20여 분 동안 담가주면 빨리 낫는다고 권한다. 제 몸의 치유력을 도와주라는 말로 들린다. 다음 날, 손가락의 부기는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어느 새 조심이 없어졌다.

의학 강의가 진행중이다. 폐가 차가운데 찬 공기가 들어오면 냉기에 견디다 못해 기침을 하게 되는데, 이때 마스크를 써주어 찬 공기를 덥혀서 폐로 유입하게 되면 기침이 멎는다고 마스크 쓰기를 강조한다. 차단과 따뜻한 보호의 의미로 부각되는 마스크란 단어가 치료 조건의 처방 같다. 앓는 손과 감기 치료에서 치료의 이치를 빌려 마음의 외상 치료에 적용해 본다.

누구나 무의식의 어딘가에 섬이 있다. 그 섬에서 악취나 향기를 뿜어내도 알지 못해 가지 못한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림을 매체로 내면여행을 하다가 늘 궁금해 하던 내 안에 숨겨진 섬을 찾았다. 일생 동안 내 삶을 관통하며 나를 괴롭히던 불안의 원인을 알아내었을 때는 억울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육아 초기에 왜 애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렵게 놀라면 평범하지 않은 삶의 대응 방법을 택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그 섬에서 피워내는 냉기와 연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환기해야 했다. 성찰을 통해 다그치다가 죄의식에 빠지면 마음이 헐어버린 듯 가슴이 뻐근하기도 하였다. 근을 찾지 못해 주기적으로 마음의 고름짜기만 반복하며 세월을 허비하다가 ‘그림으로 떠난 내면여행’ 중 발길이 닿지 않은 몇 개의 섬을 발견하는 큰 소득이 있었다.

 

40이 되던 해, 내 안에서 자꾸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두려웠다. 마치 아기 귀신이라도 들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고, 어느 날 꿈에 나는 우는 아기를 만났다. ‘꿈에 아기를 보면 근심거리’라던 어른들의 말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래가 터진 내복의 색색 가로줄 무늬와 단추 하나 풀어진 것까지 선연하였다. 친가의 마루와 마당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어머니께 어린 날 그런 적이 있느냐고 물었고, 충분하게 인정할 수 있도록 증언해 주었다.

새벽잠이 깨리라 생각하지도 않은 두 살바기의 2월 어느 날, 나는 일어나 방안을 둘러보고 마루로 나왔다. 아무도 없다. 들녘 너머에서 해는 떠오르고 까치는 까악까악 울어대는데 아이는 눈을 찡그리고 텅 빈 마당을 바라보다 울어버린다. 우주에 던져져 혼자 있는 듯한 막막한 공포감을 감당 못한 그 아이는 두려움을 울음으로 드러냈다.

의도적으로 버림받지 않아도 안전에 위협을 느껴본 아이는 그 순간부터 어떻게 자기가 위기에 대처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고 만다. 어린 날, 나는 집요하게 어머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놀지도 못했다. 늘 어머니 곁에서도 어머니를 목말라 하며 자랐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안 돼 6·25 피난길에 들었다. 돌 안의 동생은 어머니가 업고, 나는 아버지의 등 봇짐에 올랐다. 피란통에 동생이 늑막염에 걸리고, 어머니는 송두리째 동생의 어머니였다. 무릎도 빼앗기고, 젖도 잃고, 어머니의 등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동생이 나을 때까지 나는 어머니의 관심 밖이었다.

누가 보아도 어머니는 정 많고 자식들에게 헌신하는 분이었다. 과보호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었는데도 늘 가지 못한 섬에서는 얼음조각을 떠내려 보내 나는 ‘꿈속의 아기’가 되어 칭얼거렸다.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칭얼거림이 문제였다. 네 사위들이 어머니 같은 분은 안 계시다고 입을 모아도 나는 그 말이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늘 미흡하였다.

그해 2월, 내 마음의 풍경은 갈라진 얼음장이 잔설을 머리에 얹고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주책스럽게도 아버지의 등에 한번 업히고 나면 살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남편의 등을 빌려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차가운 바위에서 피어올리는 냉기는 그 절기만 되면 고개를 들어 몸으로 반영되었다. 내 마음의 풍경화에서는 그 지점에 커다란 바위가 그려졌다. 발달 초기에 마음을 닫아 걸어 어머니가 늦은 사랑을 흘려보내도 그 빈자리는 완전 퇴행하여 그 자리에 가서 채우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그런 내가 어느 시점부터 어머니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가지게 되며 갈증과 애정의 양가 감정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나 한번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갈등의 연속으로 기억 속의 어머니와의 화해가 문제의 쟁점이 되었다.

나는 단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에게 덤비고 싶었다. 내 속말을 토하고 싶었다. 나는 말이 밀고 올라오지 못하므로 일부러 싸워야 했다. 재채기가 적극적인 날숨이며, 싸움이 적극적인 대화라고 해석하기로 하였다. 50년 넘게 갇힌 아이의 말은 그렇게 마음을 찢고 튀어나갔다. 상처의 근이 빠지고 싸움은 끝났다.

나는 내면여행의 여정을 가족에게 자세히 설명하며 어쩔 수 없는 퇴행 기간 동안 ‘따뜻한 물’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보아 넘기기 어려워도 절대 믿음을 가지라고 하였고, 가족은 찌푸리지 않고 침묵으로 기다려주었다. 기억의 새 지도가 그려지기 전에 관계가 덧날까 봐 친정 식구들에게는 당분간 단절하기로 하였다. ‘마스크’ 요법이었다.

마음 작업이 아무에게나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해할 만한 한 동생에게만 말하였다. 마음을 쨌으니 나는 당분간 따뜻하게 보호받은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 든 어머니를 느닷없이 힘들게 한 탓으로 내게 쏟아질 냉기도는 말을 차단하기 위해 아무 연락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7개월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내가 다가가고 있다. 늘 감정은 어린 날에 매여 있으면서 현실적인 자리가 불편했는데 나이만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던지… 기억에 갇혀 울던 아이는 탈출에 성공하였다. 올 2월에는 눕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보는 이마다 편해 보인다고 말해 준다.

나를 알고 어머니를 이해하고 다시 보호하기까지 50년 세월을 어떻게 말해 줄까. 자라지 못해 함께 묶이지 못하는 실가닥 하나가 늘 삐져나와 너덜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문제삼지 않고 무덤까지 가져가는 사람에 비하면 늦은 해방이라도 참 좋다.

‘따뜻한 물’과 ‘마스크’의 보조 요법을 나는 여러 곳에 적용하며 삶을 치료한다. 애정 없이 골 깊은 상처에 도전하는 것은 망가지는 일이다. 나는 무의식에 갇힌 미성숙한 감정을 해방시켜야 마음이 장난질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누구에게나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현대수필>로 등단(93년).

저서 『나는 사람꽃이 좋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