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기

 

 

                                                                                        구양근

“뭐요? 형님이 미국엘 일 년 간 오신다구요?”

“왜? 내가 가면 안 되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하여튼 많이 변했습니다. 형님은 미국을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미국을 좀 미워한 건 사실이지만.”

“아닙니다. 농담했습니다.”

미국에 사는 사촌 동생과의 대화 내용이다. 오랜만에 한 전화인데도 그 말부터 꺼내는 걸 보면 내가 미국을 좋아하지 않았던 정서가 동생에게 깊게 인상 박힌 모양이다.

미국은 우리 나라를 두 동강이 내놓고, 가장 부도덕한 국가 이스라엘을 탄생시키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죄 없는 나라라도 짓이겨놓은 그런 나라라는 생각을 한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우리 과 후배 교수가 이 년 전에 안식년으로 출국한다고 했을 때 미국을 권했다. 그는 처음에는 중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작정하고 있었다. 나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미국으로 가라고 강력히 나의 이론을 펴서 추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갔고, 이번에 나도 안식년을 맞아 서슴없이 미국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파견되어 가는 것을 일명 교환교수라고 한다. 그쪽 연구소 소장으로부터 내 구비서류를 다 받았다는 내용과 부하직원에게 수속을 진행시키라고 지시하였다는 메일까지 받았다. 이제 허가서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들딸까지 데리고 가려고 한다. 아내는 저 세상에서 나에게 ‘파이팅!’을 외칠 것이다.

나는 교환교수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 번 떨어지고 네 번째에야 허가가 난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안식년으로 출국을 신청하는데 떨어질 수가 있느냐고 하지만 나만은 떨어지니 어이 하랴. 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와 K교수와의 악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의 기운을 타고 각 대학에 교수협의회란 것이 탄생하였다. 고故 S교수가 회장을 맡고 내가 부회장을 맡아서 조직한 교수협의회에 K교수라는 엽관파가 한 명 끼여들었다. 어느 민주단체나 독립협회 같은 곳도 자기 사리사욕만을 노리는 엽관파는 끼여들기 마련이다. 우리는 K교수가 일류 대학을 나왔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젊은 교수여서 섭외이사라는 직책을 맡겼다.

그때는 안식년이란 용어도 없고 ‘해외 파견 교수’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총장이 임의로 고생한 교수에게 일 년에 한두 명씩 주는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총장이 임의로 하지 못하게 교수평의회에서 인수하여 규칙을 정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K교수가 섭외이사를 맡고 있어서 그에게 규정을 짜오게 하였다.

규정을 짜온 내용을 보고 회장과 나는 입을 벌리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K교수가 짜온 내용은, K교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될 수 없게 자기 맞춤으로 짜온 것이 아닌가?

‘외국에를 한 번도 안 다녀온 교수를 우선으로 한다. 외국에를 한 번 도 안 다녀온 교수가 복수일 때는 유학도 안 다녀온 교수를 우선으로 한다. 유학도 안 다녀온 교수가 복수일 때는 젊은 교수를 우선으로 한다. 젊은 교수 중에서도 최근 박사 학위를 받은 자를 최우선으로 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고참 교수가 우대는 받지 못할지라도 불리하게 되는 법이 어디 있으며, 외국어를 잘하는 교수가 우선권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불리하게 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되면 십 년 이상이나 유학을 하고 중진급 교수가 되어 있는 나는 영원히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K교수처럼 외국에는 발도 디뎌 본 적이 없고, 가장 젊으며 박사 학위를 한 달 전에 받은 사람이 전교에서 순번 1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비열한 놈!”

나는 발끈하였다. 그러나 회장은 내 손을 잡고 오히려 사정을 한다.

“우리가 한 번 사람을 잘못 보고 맡겼으니 그대로 인정합시다.”

그러나 나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처사가 나로서는 참기 어려웠다. 드디어 나는 어느 술좌석에서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그에게 심한 모욕을 주고 말았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은 못 믿어! 어디서 그따위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 뒤로 그는 나에게 앙갚음을 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만든 규칙에 의하여 미국을 일 년 간 다녀오더니 당시 총장에게 아부하여 연구처장이 되었다. 그때 내가 안식년을 신청한 것이다. 다른 학장들이 보기에는 내가 가장 유리하더라고 했다. 가장 큰 단과대학에서 신청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며, 신청자 중 가장 고참 교수이며, 논문 수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고 K교수가 내놓은 규정을 보니 내가 가장 불리한 조건이 되더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도 교내 파견 교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그 어려운 국비 파견 교수를 신청하여서 일본을 다녀왔다. 국비 파견 교수는 위험성이 많고 망신당할 가능성도 많아서 보통 교수들은 신청도 안 하는 것이다. 교내에서 경쟁하고 교육부에 올라가서 전국 교수들과 경쟁하고 외국어 시험까지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또 만 7년이 지나 안식년이 왔기에 신청하였으나 역시 7년 전의 잣대를 가져다 대니 될 리가 없었다. 그 다음 학기에 또 신청하였으나 한 명 떨어지는 가운데 또 내가 떨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총장님을 뵙게 된 자리에서 그런 악법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였더니, 그런 법은 반드시 개정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총장님은 법을 개정하였다.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교수의 백분비를 늘리고 고참 교수도 갈 수 있게 조항을 바꾸었다. 그렇게 하여 추가 공모를 해주어 내가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큰 보직을 차지하고 있는 K교수는 법 개정을 끝까지 반대하더라고 했다.

그가 큰 보직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이 또한 재미있다. 우리 학교에 사태가 벌어지자 K교수는 현 총장을 몰아내자는 최선봉장이었다. 명분 없는 싸움에 그는 어깨띠를 두르고 각 교수들을 선두 지휘하며 주먹을 치켜올리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태가 기울어지고 총장 반대파가 불리해지자 어느 새 총장에게 빌붙어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예의 큰 보직을 따낸 것이다.

전에 교수협의회 회장을 하셨던 고 S교수는, 생전에 많은 사람에게 K교수를 조심하라는 말씀을 남겼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자를 상대로 모든 교수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으로 정정당당히 내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나도 만만한 사람은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