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도 따라왔네

 

 

                                                                                        정선모

오늘도 택배 회사에서 다녀갔다.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에 복숭아가 가득 담겨 있다. 제대로 포장을 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나무에서 따자마자 바로 담아 보낸 것이다. 오는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많이 상하였다. 보낸 정성이 아까워 몇 시간 동안이나 상한 부분을 도려내어 껍질을 벗기곤 잼을 만들었다. 한 상자의 복숭아가 겨우 작은 병 세 개로 졸아들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느닷없이 시골로 내려간 작은 오라버니는 평소의 소원대로 나무를 심고, 닭이며 오리도 키우고, 이것저것 밭 작물을 가꾸며 살고 있다. 돌멩이를 맨손으로 하나하나 들어내어 만든 밭이다. 그 덕분에 우린 심심찮게 오라버니가 가꾼 농산물을 얻어먹는다. 때론 택배비가 더 들어 보내지 말라고 해도 “그거 무공해여”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새끼 오리를 몇십 마리 사다 키웠는데 어느 날 한 마리가 포롱포롱 날더니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오리들도 덩달아 몽땅 날아가 버리는 걸 멀거니 지켜보기도 하고, 고구마를 심어 곧 수확할 기쁨에 한껏 젖어 있는데 두더지가 모두 파먹어 상심하기도 하면서, 경험이 없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차츰 농사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어렸을 땐 동생과 나는 작은 오라버니를 무척이나 무서워하였다. 나보다 여섯 살 위여서 감히 내놓고 미운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는 처지였지만, 우리만 보면 잡다한 일로 심부름을 많이 시켜 될 수 있으면 오라버니 눈에 뜨이지 않도록 숨어 다니기에 바빴다.

심부름 중에서도 가장 하기 싫은 것은 추운 겨울밤에 지하실에 가서 고구마를 꺼내 오라는 것이었다.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추운 날,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읽느라 정신 없을 때 심부름을 시키는 것처럼 싫은 일이 또 있을까. 유난히 추위를 타던 나는 아랫목을 거의 독차지하였는데, 심부름 갔다오면 보나마나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 터였다. 살짝 언 물고구마를 날로 깎아 먹을 때의 그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맛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한밤중에 지하실에 내려가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희미한 알전구가 밝혀진 지하실에 더듬더듬 내려가 가마니를 열고 고구마를 꺼낸 뒤, 돌아서는 머리 끝은 늘 하늘로 솟구쳤다. 어둠 속에서 검은 손이 불쑥 나와 내 머리채를 움켜쥐거나 다리를 잡아 끌 것만 같은 공포심에 신발도 채 못 벗고 마루로 뛰어오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비밀 이야기 한답시고 언니와 다른 방에 가서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여도 건넌방에 있는 우리에게 다 들려, 목소리가 큰 사람은 비밀이 없다는, 전혀 논리적 근거가 없는 단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키도 어찌나 큰지 버스를 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이고, 웬만한 기성복 바지는 발목에서 대롱거린다. 아마 큰 몸집도 우리를 주눅들게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한 번도 오라버니에게 대들거나 시킨 일을 하기 싫다는 소리 한 번 못하였던 것은 다 이런 까닭에서였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오라버니가 시골에 내려가 살더니 시시때때로 이렇게 무엇이든 보내온다. 말끔하게 포장하여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막 뽑은 무나 배추 혹은 열무를 흙이 가득 묻은 채로 보내오는 것이다. 옮기다 보면 거실에 흙이 툭툭 떨어지고, 다듬다 보면 달팽이가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산비탈을 개간하여 조금씩 심은 밭 작물을 수확하다 문득 동생이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주섬주섬 담아 보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내온 고구마 자루 속엔 크고 작은 게 마구 뒤섞여 있다. 아마 한 고랑을 주르르 파내어 덥석 담은 게 분명하다.

가진 것 다 퍼주는 성격이라 집에 남아나는 것이 없을 정도인데 유독 나눠주지 않고 꽁꽁 숨겨두는 것이 있다는 소리를 얼마 전에 들었다. 그것은 바로 매실주다. 매화나무를 심은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매실이 열려 그것으로 담근 거라고 한다. 나도 한 병 달라고 졸랐는데 바로 그 매실주를 목숨걸고 지키고 있다는 거였다. 한 잔만 맛보여 달라고 이웃들이 아무리 졸라도 동생 것이라며 절대로 개봉하지 않고 있단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날, 나는 마시지도 않은 매실주에 혼곤히 취하였다.

잘 손질되어 비닐봉지에 얌전히 담겨 있는 야채들을 주로 사먹는 나에게 흙까지 딸려보낸 오라버니의 투박한 손과 퉁명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할말만 하고 탁 끊는 그 모습이 마치 뚝배기같다. 보내온 작물로 음식을 만들며 나는 비로소 오라버니의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방금 전에도 복숭아 잘 받았냐는 전화가 왔다. 난 복숭아가 잼이 되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