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치킨, 그리고 쓸쓸함

 

 

                                                                                          이경은

길거리를 가다 보면 두서너 집 건너 있는 것이 치킨 집이다. 나는 닭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과천 한 구석에 있는 치킨 집엔 자주 간다. 그 곳은 K라는 시인이 하는 가게이다. 같은 문학 단체에 속해 있어서 문우들이 약속 장소로 정해 놓은 곳인데, 사랑방이라는 다소곳한 말보다는 아지트라는 조금은 우중충한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이젠 과천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시콜콜한 회의나 모임이 끝나면 으레 그 곳에 들러서 호프 한 잔씩이라도 하고 헤어져야 그 날 일의 마침표가 찍어지는 기분마저 든다.

처음에 나는 그의 가게에서 모이는 것이 편치 않았다. 등산 갔다 오는 길에 들르는 사람들의 끈적끈적한 땀 냄새나 술 몇 잔에 뱉어내는 목청 높은 건주정, 튀긴 치킨은 냄새에 유난히 민감한 나를 곤욕스럽게 했다. 더욱이 요즘은 모든 가게들이 음식보다 오히려 외부의 화려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에 더 힘쓰는 형편인지라, 식탁 몇 개만 덜렁 있는 투박한 가게가 낯설었다. 입으로는 소박한 성품이라고 했지만 나도 공주병이니 뭐니 하는 족속인 게 분명한 모양이다.

게다가 치장이라고는 애당초 모르쇠로 하며 털털거리고 다니는 그와 ‘시詩’라는 세계와 쉽게 줄이 그어지지도 않았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 나는 평소의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드디어 한 마디를 했다. 주인이 시인이니 시라도 한 수 적어 벽에 걸어놓든지, 단아한 그의 아내를 누군가 멋지게 스케치해 준 도화지를 그냥 덜러덩 벽에다 걸지 말고 액자라도 해놓으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는 이내 “버릇 나빠져요” 하며 픽 웃고 만다. 순간, 그 한 마디의 대사는 나에게 다중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 말은 평소 그의 아내에 대한 가부장적인 태도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내 자신이 이 세상에서 버릇이 많이 나빠졌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렇다. 난 확실히 버릇이 나빠졌다. 그저 눈에 좋고 입에 좋고 귀에 좋은 것들만 좋아한다. 조악한 음식보다는 화려한 7첩 반상의 상차림을 좋아하고, 물을 마셔 목을 축이는 일보다는 금은보화로 장식하고 도금한 그릇에 더 정신을 팔고, 경계와 질타의 소리보다는 칭찬과 아첨의 말에 더욱더 귀가 솔깃했다. 먹고 살기가 나아져서인지, 본질보다는 외견에 마음을 많이 빼앗기고 사는 시대에 사는 탓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몸과 마음이 오염된 것은 확실하니 시대를 탓하든 나 자신을 돌아보든 해야 할 일이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위대한 로마 제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술과 쾌락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생의 최고 선을 ‘쾌락’에 두었던 에피쿠로스는 물질적 쾌락보다는 고차원의 질적인 쾌락`─`아타락시아를 추구하며 금욕과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나 말년에 추하고 늙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 화산의 분화구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는 뒷얘기에 나는 괜히 뒷맛이 씁쓸해진다. 에피쿠로스라는 말 속에 ‘먹고 마시고 즐기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이제 모든 것을 버릴 나이에 자살이라니, 완벽한 쾌락의 미학인지 어쩐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쾌락주의`─`하지만 그것은 이상스레 죽음의 끈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뇌』라는 소설 속에서 작가는 쾌락이란 인간 뇌 속의 ‘쾌감의 중추신경’이라는 특정 부위가 자극되면 느껴지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결국 소설 속의 주인공 의사는 지독한 쾌락을 맛보려다가 자극의 위험 수위를 넘겨 죽음에 이르고 만다. 쾌락의 이런 비극적인 모습을 알았기에 토머스 모어는 그의 책 『유토피아』에서 건강한 육체와 정신적 쾌락의 우위성을 유난히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는 언제든지 인간들의 사는 모습에 따라 단 한순간에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수 있기에 말이다.

K시인의 가게를 들락거리면서 나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등산 갔다가 편히 들러서 한 잔 하든지 부부싸움 끝에 홧술로 한 잔 들이키든지 간에, 주머니 사정이 얄팍한 이들이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장소로는 촌스럽고 투박한 분위기가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인테리어가 너무 화려하거나 세련되면 편히 죽치고 앉아 마시는 질펀함이 적고, 호프 한 잔에 인생을 얘기하는 거나함이 모자란다.

도통 그런 가게에 있을 것 같지도 앉은 최신 시 잡지나 좋은 시집들이 한 구석에 처박히듯이 쌓여 있는 모습에서 나는 시인의 모습을 본다. 생활 한가운데 살아 있는 생명력 넘치는 인생의 시 한 편이 거기 엄숙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는 때때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사람의 척도를 가름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외모는 말할 수 없이 지적으로 보이는데 생전 책 한 권 안 읽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실망감은 크다. 허나 어느 한 구석에도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서 철학이나 문학, 예술의 깊은 이야기가 술술 배어나올 때 나는 사는 맛을 느낀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정신적 허영이나 사치, 지나친 허위의식일지 몰라도 내겐 이 세상에 든든하게 발을 딛고 서게 하는 삶의 에너지이다.

요즈음 괜스레 마음이 쓸쓸하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쁜데 마음은 더 외롭고 허전해진다. 나도 분명 새삼 좋은 것도 싫은 일도 없는, 세상사 모든 게 그저 그런 중년병에 걸린 모양이다. 오늘도 모임이 끝나면 모두들 K시인의 가게에 모일 것이다. 왠지 이런 날엔 한 잔의 호프와 시詩를 마시고, 저 멀리 방울 소리를 울리며 떠나간 목마와 버지니아 울프를 노래한 시인을 떠올리며 눈물 한 방울 찔끔거려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