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시간과 공간의 삶

 

 

                                                                                       박장원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만, 공간은 누구에게나 다른 것에 우리는 고민해 왔다. 시간과 공간의 근원이 결국 나라는 사실을 반증함에 다름 아니다.

나의 탐구가 인간의 영원한 바람이며, 작가가 제시하는 색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독자는 한껏 행복해 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우렁찬 합창이 곧 생명의 요체이니, 때문에 빠른 세월의 강을 통해 바라본 넓고 넓은 바다가 수필에 담겨야 한다.

28편의 수필이 게재된 2003년 여름호 <계간 수필>에는 시공의 알찬 조화로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러한 결정들은 알알이 소중하다.

 

한때는 ‘자유인’으로 불리던 나는 너무나도 쉽게 제도의 체포 영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선 관성을 비타민처럼 장복長服하며 나날을 죽이고 산다. 굳이 핑계대자면 어린 자식 때문이다.

“아빠, 무슨 법이 그래요?”

“언제까지 이 집에 살아야 돼?”

“할아버지가 아니고 큰형님이에요!”

“늙은 아빠 아니야, 우리 아빠야.”

“아빠, 나 이제 어린이날이 시시해요. 사나이답게 함께 술이나 한 잔 해요.”

─ 안경환의 ‘늙은 아비의 각오’ 중에서

 

자유인이 허공의 굴레에 갇혔다.

늙은 아빠는 어린 자식 때문에 시공을 좁혀야 한다. 희망도 계획도 없다며 점필재 선생까지 불러들이지만 그의 하늘과 땅은 캄캄하고 누렇다. 엄살일까 비명일까, 아무튼 가슴이 서늘한 시간과 공간이다. 법에 정통한 그가 핏줄 사이에선 도리 없이 관성비타민을 장복하며 나날을 죽이지만, 함께 술이나 한 잔 하자며 능청떠는 아들을 통해 현재의 각오가 산뜻하게 제시된다.

 

차츰 그는 그것이 자기의 본질이고, 그것을 이제는 버릴 수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차라리 세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기준을 설정하기에 이른 것 같다. 요즈음의 그의 언행에서 나는 이런 낌새를 채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데 이것이 현재의 그라는 인간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흐르는 시간이 끼어들지 못하거나 시간에 무관한 존재들이고, 그는 이런 것들처럼 밖에 대해서 투명할 수밖에 없다.

─ 남기수의 ‘형벌’ 중에서

 

그와 내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변화하는 공간에 맞춰 들어가지도 흐르는 시간에 끼어들지도 못하니, 늘 다른 물이 흘러오는 개울 가운데 서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하려고 애쓴다.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변해야 한다는 명제를 푯대로 삼았지만, 닳아빠지지 못해 꿈 같은 구름 속에서 천진한 친구로의 긴 인생이라 고백한다. 내 안의 타자를 차용했지만 투명하게 산 내력을 형벌이라고 실토하는 것에 저으기 공감한다.

 

이 세상에 시간 앞에 빛바래지지 않는 것은 없으니 시간과 생활의 타성에 의해 서서히 진행되는 추락일 수도 있고, 인간이란 미완성의 존재가 원래부터 사랑의 형식에는 걸맞지 않아서 추락은 기습과도 같을 수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러면서 한편 꿈꾼다. 사랑이 영원하기를.’

어리석을지언정.

─ 서숙의 ‘나무꾼과 선녀, 그 후’ 중에서

 

과거 속으로 끊임없이 밀려가면서도, 흐름을 거스르며 배를 띄우고 파도를 가르는 개츠비가 위대한가. 뇌쇄적이리 만큼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이상주의자의 자신을 불태우는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하다는 신념일까. 나무꾼과 선녀, 그 후는 물론 이카루스의 날개에서 봄날은 간다까지의 슬프고 아름다운 바람의 끝을 기습적인 추락이라 하면서도 어리석은 꿈을 꾸고 싶은 작가에게 사랑은 영원하다.

 

오늘 나는 혼자서 남한강에 왔다.

남들이 보기에 뒷모습이 초라하거나 을씨년스러울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물가에 바싹 다가서 걷고 있다. 물가 곁을 걸을 수 있도록 자갈을 얼음이 단단히 붙잡아 주고 있다. 걸을 때마다 자갈 부대끼는 소리가 난다. 밟힌 자갈이 밀리면서 그 옆의 자갈과 부딪친다. 부딪히는 자갈들이 소리를 만든다. 자갈 부대끼는 소리.

─ 유경환의 ‘겨울 강’ 중에서

태풍 계절의 가거도와 겨울 강가의 남한강 그리고 일선기자 시절과 뒷모습이 초라한 세월이어도, 소리는 하나다. 그것은 부대끼는 자갈 소리. 그 소리는 한결같지만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 그의 물음이다.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신음한, 힘들 때마다 힘들어한 비명이기에 겨울 강가에서 밟히는 자갈 소리는 삶의 연속이다.

아무튼 가거도와 남한강의 시간과 공간은 멀지만, 검은 갯돌과 얼음 반 자갈 반의 부대끼는 생生의 소리는 오랫동안 선의의 자리다툼이니 영혼의 황홀경에 바짝 다가선 셈이다.

 

인류 문화의 발전을 이끌어온 지적 학문도 문화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화는 다원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주고받는 give and take ‘교접’을 통해 더욱 건강해지고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를 조직화하는 학문의 이론도 새들이 좌우의 날개로 나를 수 있듯이 좌우의 이론이 출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특히 문화의 핵을 이룬 사상은 너와 내 toi et moi가 만나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며 공존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 정규복의 ‘분별없는 생각’ 중에서

 

‘존재와 시간’을 꿰뚫은 대철학자도 전제성에 대한 열망 때문에 이상과는 달리 엉뚱한 종말로 다다라 결국 미네르바의 부엉이 신세가 된다. 시간이 공간을 냉철하게 드러낸다. 하여간 너와 내가 끊임없이 주고받으면서 공존하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결국 분별없는 생각의 소산이라 하였지만, 그러한 이상적인 우주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도 분별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음은 무엇인가.

 

“비켜요, 저리들!”

염사들의 손놀림이 시작된다. 어머닌 그 틈을 비집고 아버지의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내어 곁에 있는 내 손에 쥐어준다. 냉장고 속에 있었던 탓인지, 차가운 아버지의 육신 탓인지, 시계의 금속성 촉감이 차갑기만 하다. 찰칵 찰칵, 아버지의 시간은 멈추었는데 시계는 어김없이 제 시간을 간다. 새삼스레 아버지의 죽음이 뭉클거린다. 숨이 탁 막힌다.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의식 한가운데를 송곳처럼 파고든다. 이제 정녕 아버지는 생명의 끈을 놓으신 건가. 시침은 거꾸로 돈다.

─ 정태헌의 ‘멈추지 않는 유산’ 중에서

 

염사가 ‘비켜요’ 하며 시간을 차단시킨다.

그는 구박을 들어가며 약솜으로 아버지의 눈가를 훔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는다. 염하고 관 뚜껑에 못 치는 소렴에서 대렴까지 순식간이다. 전당포 골목에서 아버지가 손목에 채워주던 은빛 시계와 영안실 냉장고에서 나온 아버지의 알몸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던 은시계가 시간의 의미를 멈추지 않는 유산으로 구체화시킨다.

시간은 빠르지만 공간은 넓다. 선부先父의 마지막을 시계와 눈물 사이 우두커니 서 있는 비어 있는 곳으로 넓혔지만, “시간은 돈이다. 아껴 써라”는 아무래도 시간을 동여맨다.

 

수필에서 소재론이 늘 분분한 것은, 다양하고도 특이한 체험을 통한 수필가의 존재가 글의 풍격風格을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소재의 외형이 사고·체험·관찰 그리고 독서로 대충 얼개가 짜여진다면, 그 제재의 내면은 시간과 공간의 개성적인 추구와 파악이 요체가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겠지만, 공간은 누구에게나 다른 함축에는 보다 넓고 한층 깊은 시각과 접근을 수필은 요구하는 것이다. 누구나가 쓸 수 있는 것이 수필이지만, 누구나가 쓸 수 없는 것도 수필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누구에게나 시간과 공간은 경經이요 위緯이지만, 시공의 원활한 교류에서야 종횡무진한 산문의 원형(archetype)이 제시되는 것이다.

‘작가마다 환경과 생애가 같을 수 없고, 따라서 그 개성이 같을 수 없다. 내게는 내 소리가 있고 나만이 해야 할 말이 있고, 나만이 가진 수법과 비밀이 있기에 여기에 필적할 작품을 쓰면 되는 것이고, 쓰고 못 쓰는 것은 재질의 문제에 속한다’는 이야기는 삶의 시간과 공간이 산문에 개성적이고 질박하게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어제는 산수유가 꼬물꼬물거린 것 같았는데, 이제는 태풍이 웅성웅성 몰려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 공간은 바뀐다.

작가의 고민하는 시간 속에서, 독자의 사색하는 공간은 그만큼 풍요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