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새의 육추育雛 일기

 

 

                                                                                        장돈식

나의 서재는 2층에 있다. 남으로 난 창은 넓고 베란다가 달려 있다. 지난 겨울은 눈이 깊어 산새들이 먹이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이 베란다에다 들깨, 좁쌀, 옥수수 가루, 기장쌀 따위를 놓아주었더니 꽤나 많은 새들이 날아들었었다. 봄이 되자 그 새들은 제 갈 곳으로 다 갔는데, 딱새 한 쌍은 집 근처를 떠나지 않았었다. 딱새는 참새만한 작은 텃새인데 수컷은 정수리에서 뒷목까지는 은백색이고 멱, 윗가슴은 검다. 배는 붉은 갈색이고 날개는 검은 아름다운 새이다. 암컷은 연한 갈색이다.

올 봄에는 서재의 구조를 약간 바꿀 일이 있어 일꾼들을 대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 지난 5월 15일부터였다. 어찌나 먼지가 나는지 며칠을 창문을 열어놓고 일을 했는데, 공사가 다 마무리될 무렵 그 사이에 딱새 암수가 서재 안으로 들어와 서가書架의 맨 위인 6단, ‘모파상 전집’ 위에다 둥지를 틀었다. 천적인 뱀이나 까마귀, 까치 등으로부터 안전한 것을 안다.

5월 25일에 시작, 온갖 검불을 물어다 둥지를 틀기 시작하더니 커피 잔 크기의 보금자리를 야무지게 만들었다. 6월 1∼2일에 베란다 난간 위에서 암수가 사랑을 나눈다. 알 낳기가 임박했다는 신호다. 6월 6일 손끝으로 둥지 안을 더듬어보니 작은 도토리 크기의 알이 있다. 그 작은 몸에서 이런 알을 낳다니, 이건 마치 닭이 야구공만한 알을 낳은 것과 비교될 수 있다. 6일, 7일, 8일 3일 간을 매일 한 개씩 낳고는 9일 하루를 건너 10일에 또 낳아 모두 4개다. 오죽 피곤할까, 3일 간 휴식을 한다. 그리고선 13일부터 암컷은 먼저 포란抱卵을 시작했다.

집안에 함께 사는 녀석들이기에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다. 수놈을 날개 상 자, 상翔이라고 했다. 성은 이 곳 지명 ‘방그러니’를 따서 ‘방글 상翔’, 방그러니의 날개라는 뜻이다. 암컷은 지어미 빈 자, 빈嬪, ‘방글 빈’, 방그러니의 지어미라는 의미를 지닌다. ‘빈’은 밤낮 없이 꼼짝않고 알을 품는데, 수컷 ‘상翔’은 보이지 않아 ‘무책임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커피 물을 끓이는데 다관茶罐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니, 어디에 은신해 있다 나타났는지 ‘상翔’이 나한데 덤빈다.

‘어! 이게 날개도 없는 게 새 소리를 내.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나가’ 부리로 머리를 쪼고, 날개로 후려친다. 근처에 은신, 경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아래층으로 퇴각을 한다. 평소에는 사람에게 호의적이던 녀석인데 주전자에서 나는 소리를 새 소리로 알았나 보다.

나는 약간의 용단을 한다. 2층 서재를 통째로 내어주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좀 불편했지만 번식을 시작하면서 두 놈이 모두 신경이 항진亢進되어 있기에 내가 양보를 한 것이다.

이런 새들의 부화는 ‘포란 시작, 15일’ 동안인 걸로 알고 있다. 28일, 엄지 새들이 먹이로 벌레를 물고 들어간다. 틈새로 새 둥지를 엿보니 주둥이 둘레가 샛노란 네 마리 새끼가 입을 벌리고 먹이를 보챈다. 한 달 전 증손녀를 보던 날의 흥분 같은 게 가슴을 스친다.

부화 4일째 날, 서울서 쉬려 온 대학생 10여 명이 아래층에 머물고 있었는데 2층은 금단의 구역이라고 일러두었건만, 그 중 한 사람이 올라가서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창문은 닫는 것’이란 습관이었을 게다. 그러자 딱새들의 출입구가 닫혔다. 그게 이른 오후였는데 그걸 알고 부랴부랴 창문을 열어준 시간이 다음 날 오후도 한참 지나서다. 창문이 열리자 안달을 하던 큰 새들은 새끼 먹이를 물고 다시 드나들었다. 꼬박 하루, 새끼들이 굶었다.

새끼들이 무사할까, 불안해졌다.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둥지를 건드리며 들여다보니 움직임이 없다. 가슴이 철렁, 새끼들은 그 동안 퍽이나 자랐는데 머리들을 가운데로 모으고 죽어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떨리는 손으로 둥지를 꺼내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풀이 죽어 울상의 얼굴을 한 나를 보고, 아내는 “무슨 일이세요? 왜 그래요!” 한다.

“딱새 새끼들이 다 죽었어!”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아내가 둥지를 들여다보고는 “불쌍한 것들…” 하며 그녀도 역시 눈물이 글썽했다. 허탈할 엄지 새들에게 새끼의 죽음을 알게는 해야지, 다시 둥지를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이튿날 아침 기왕 죽은 거 ‘묻어라도 주어야지’ 이건 사람의 잘못이다, 그 어린 것들이 무슨 기운이 있어 하루를 굶고 버틸 수 있었겠는가. 시체들을 거두려고 2층을 올라가다가 둥지쪽을 바라보다가 섬뜩! 머리털이 쭈뼛한다. 그리고 손등으로 두 눈을 비빈다. ‘이럴 수가!’ 엄지들이 물어온 먹이를 네 마리의 새끼들이 서로 받아먹으려고 아우성이다. 나는 교회에 출석하는지 오래이건만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인 ‘부활’을 아직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혼자 본 것도 아니고…….

오후에 ‘세상에는 부활의 기적’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식구들을 데리고 2층 서재로 올라갔다. 그런데 조용하다. 둥지를 다시 꺼내니 어제보다도 더 자라 이젠 날개 깃털의 색깔을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움직이는 놈이 하나도 없다. 한 마리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올리니 목과 두 다리가 축 늘어진다. 죽은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아하! 의사疑死’, 즉 죽은 척하는 연기演技였다. 방어 수단이 없는 약한 동물이 시체에는 관심이 없는 포식자들을 따돌리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간파하고 실소失笑를 한다.

딱새는 명금류鳴禽類 중에서 비교적 조용한 새에 속한다. 독특한 울음소리도 없다. 그런데 아침만 되면 그게 아니다. 큰 새들, 새끼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 독특한 소리를 내는데 새끼 네 마리가 차례로 돌아가며 어버이들과 음성을 주고받는다. 산야는 넓고, 동족은 많은 사이에서 자기 가족을 식별하는 건 전적으로 음성으로 판별할 것이다. 먹이를 먹일 때도 질서는 있었다. 수컷 ‘상’이나 암컷 ‘빈’은 한 번에 몇 마리씩 물고 와서는 한 마리씩 입에다 넣어주는데, 새끼들은 질서정연하게 시계바늘 방향으로 돌면서 공평하게 받아먹는다.

7월 11일, 무슨 볼일에 2층을 올라갔다. 책상 가까이 다가가자 서가書架의 둥지에서 새끼 새들이 일제히 날아 오르더니 유리문에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지며 소란이다. 이전 같으면 죽은 척할 놈들이 이만큼이라도 날 수 있으니 그 죽은 척의 의사疑死 연기가 이제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12일 오전 10시에 다시 올라갔다. 이미 어린 것 세 마리는 다 둥지를 떠나고 제일 어린 것 한 마리만이 있다. 이윽고 어미 새 ‘빈’이 먹이를 물고 와 창 밖, 난간에서 막내를 부른다. 배고픈 막내가 둥지를 박차고 날아가 어미 곁으로 가나 어미는 먹이를 주지 않고 서쪽 숲으로 유인한다. 그 시간이 12일 오전 10시. 이렇게 해서 5월 15일에 시작된 방그러니의 딱새네 가족 늘리기는 2개월 만에 끝이 났다.

 

장돈식

<수필문학>으로 등단(89년). <현대수필> 문학상 대상 수상(2002년).

저서 『산방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