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형

강변 모래톱에는 다북쑥이 지천으로 자랐다. 정월 대보름날 할아버지는 그걸 꺾어다가 달맞이 홰를 매 주셨다. 싸리 빗자루 모양의 홰에는 내 나이 수만큼만 매끼를 묶게 마련인데 나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내 홰가 다섯 매끼일 때는 여섯 매끼 홰를 가진 아이가 부러웠고, 겨우 여섯 매끼 홰를 가지게 됐을 때는 일곱 매끼 홰가 부러워서 그랬다. 하지만 매끼 하나가 늘어나는 데는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이건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날이 저물면 아이들은 미루나무가 늘어선 언덕에 모여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갓 세수한 누나 얼굴처럼 훤한 달이 도당산 늙은 소나무 위로 붕긋이 솟아오르면 아이들은 앞다투어 홰 끝에 불을 붙였다. 따다닥 따다닥 다북쑥 타는 소리도 아이들 소리에 금방 묻혔다.

“다님(달님) 다님 비나이다, 다님 다님 비나이다.”

무엇을 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홰가 다 탈 때까지 꾸벅 꾸벅 절까지 해가며 빌고 또 빌었다. 나도 빈 것이 있다면 빨리 열 살이 되게 해 달라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은 것은 불장난이 별나게 재미있던 날 밤에 오줌을 싸서 체면을 구겼던 일뿐이다.

여름날 저녁상은 으레 마당에 깔린 멍석자리 위에 차려졌는데 칼국수에 호박나물이나 보리밥, 열무김치에 된장국이 단골로 올랐다. 식사가 끝나 상을 물리고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자리를 뜨시고 나면 나는 할머니 무릎에 누워 이런 노래를 들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던(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은도끼로 찍어 내어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 삼간 집을 짓고 양친 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은도끼 금도끼까지 써 가면서 겨우 초가 삼간만 짓겠다는 것이 조금 불만이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아이를 생각하면 양친 부모와 천년 만년 살자는 말이 여간 든든하지 않았다. 그런 날의 달은 으레 보름 어간의 중천에 둥실 뜬 탐스러운 달이었다. 어쩌다 눈썹 같은 초승달을 볼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차라리 쏟아질 듯한 별 무리 속에서 북두칠성을 찾거나 은하수의 전설 속에 빠져들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초등학교 오 학년 가을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 일을 돕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혼자 돌아온 일이 있었다. 오 리 길이 실한 학교 길 중간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어른들도 혼자 다니기를 꺼리는 곳이었다. 그 날 따라 길에는 행인 하나 없이 적막했다. 산모롱이를 돌아 저만큼 묘지가 어렴풋이 보이자 오금이 저리고 이마에는 진땀이 배었다. 운동회에서 뜀박질로 공책을 탄 실력으로도 귀신을 따돌릴 자신은 아예 없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옆구리에 꼈던 책보를 어깨에 단단히 매고 무작정 달렸다. 숨이 턱에 차서 더는 달릴 수가 없을 때까지. 다행히도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는 버드나무 숲이 있고 그 숲 속에 상여 도가가 있었는데 도깨비들이 거기서 산다고 했다. 궂은 날이면 퍼런 불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실제로 본 적도 있었다. 이제 이 고비만 넘기면 모험은 끝나는 셈이었다.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숲이 가까워오자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출발선에 선 뜀박질 선수처럼 숨을 고르는데 때마침 도당산 소나무 위로 연등 같은 달이 스멀스멀 떠오르면서 낯익은 산야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달빛에 용기를 얻어 단숨에 숲길을 벗어났다. 이제는 겁날 것도 급할 것도 없다. 조금 가다가 징검다리 하나만 건너면 거기서부터는 우리 집 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새 달은 등성이 위로 한 길이나 솟아 있고 징검다리도 훤히 드러나 보였다. 한결 느긋하게 징검돌을 하나씩 밟아 나가다가 나는 중간쯤에서 발길을 멈췄다. 발 밑 물 속에 뒤집힌 하늘이 펼쳐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도 달은 뜨고 갯버들도 무성했다. 그래서 달은 갯버들 가지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갯버들 속에 숨은 듯도 했다. 잔물결이 일면 얼비치다가 물결이 자면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 풍경 속에 내 얼굴도 어른거렸다. 나는 갈 곳 없는 아이처럼 징검돌 위에 쪼그려 앉아 이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라 몸이 달아 있었다.

다음 해에 6·25 사변이 나고 가을에 수복이 되자 아버지가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어 집안 형편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런 어느 날 새벽녘에 뒷간에 가다 보니 할머니가 장독대 앞에 서서 뭔가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치성이 그 날이 처음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고 아버지가 무죄 석방된 것도 그 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못 볼 것을 본 듯한 난감한 심정이었지만 추운 날씨에 동 저고리 바람으로 나와 계신 할머니를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장독 위에는 하얀 사기 대접이 놓여 있고 대접 안에는 비수처럼 섬뜩하게 날이 선 그믐달이 맑은 물 속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