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彩雲이 있는 강가를 바라보며

 

 

                                                                                           정부영

새로 이사온 집은 석양이 질 때가 더 좋다. 앞 동의 사이 사이로 내다보이는 강은 바라볼 때마다 내 안에 여러 색깔을 칠해 준다. 강의 기다란 얼굴이 보고 싶어 막고 서 있는 앞 동을 얼떨결에 제키며 머리를 기웃해 보지만, 여전히 한정된 공간으로만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도 베란다에 앉아 강가를 건너다 볼 때가 많다.

맑은 겨울날 저녁 무렵이면 석양은 밤섬 가에다 엷은 카펫을 깔아놓으며 떠나갈 차비를 한다. 강물 위에 긴 불빛 빌딩을 세워놓기도 한다. 물결 따라 흔들리는 태양빛은 제 모습을 서서히 마모시키며 사그라져간다.

눈부심이 없이 태양의 둥근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재어본다. 한 20분에서 30분 정도가 태양이 광채를 속으로 감추고 있는 순수한 시간이다. 그 본래의 모습이 내 마음을 순하게 한다. 그것은 하루의 오십 분의 일쯤 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열정이 여전히 배어나와 주위를 붉게 물들이며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여운이 있어 좋다.

오늘은 구름이 비스듬히 떠 있다. 구름이 가로지른 하늘가와 떨고 있는 강물 위로 노을이 긴 자락을 휘두르며 멀어져간다. 비껴 흐르는 구름자락 뒤에 석양이 숨으니 구름은 색깔을 입고 황홀해 하는 듯이 보인다. 마치 히말라야에서 본다는 채운彩雲인 것만 같다. 신들의 성지인 히말라야에서 채운을 보면 행운이 따라온다고 하지 않나. 내일쯤 좋은 소식이 오려나 해서 마음 한 켠으로는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12층 아파트에서 바라보기 좋은 눈 위치에 석양은 방울토마토 색에서 짙은 당근 빛으로 색을 누그러뜨린다. 그리고는 이내 바래져서 한순간 초승달 모양인가 싶더니 내려앉아 버린다. 여의도 빌딩 숲으로 가려지는가 아쉬워하다가 아슴푸레 보일 듯 말 듯한 산 속으로 가라앉는 걸 보고 왠지 제 길을 찾아간 것 같아 마음을 놓는다.

한가한 때는 이 시간을 놓치지 않고 즐긴다. 오전 중에 들어오는 밝은 햇빛은 온 집안을 활기차게 하지만, 저녁때가 되어 노출된 태양이 스쳐가듯 집안을 훑고 지나가는 것은 마치 만날 날을 기약하는 악수같이 쓸쓸하면서도 어딘가 정다운 느낌이 든다.

잔광은 밤섬의 잔설을 더욱 희게 한다. 밤섬은 남해안의 외딴 섬 모양으로 고즈넉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에 걸쳐 저 섬이 생겼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섬은 떠나가는 한 척의 돛단배 모습이다.

밤섬이 보이지 않는 한강과 보이는 곳의 풍광이 너무 다르다. 밤섬이 머문 강쪽은 숲과 흰 모래와 새가 한데 어우러져 맑은 날이면 한 폭의 수채화가 되고, 흐릿한 날이면 산수화가 된다. 노을이 질 때면 푸른 강가의 밤섬은 파스텔 색으로 그려진 유화가 된다.

지난 여름, 태풍이 몰려와 폭풍우가 친 다음에는 가장자리 모래사장에 생활쓰레기들이 걸려 섬이 그물망 노릇을 하였다. 강으로 흘러나온 생활의 잔재들은 어지럽게 섬 주위를 맴돌면서 한동안 우리를 아프게 했다. 지금은 모래 위에 잔설이 초록이 숨어 있는 나무숲을 에워싸듯 띠를 두르고 있어 겨울 강의 풍취를 한껏 더해 준다.

강물의 흐름이 멎어 보인다. 몇 마리의 오리들이 찬 기운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맥질을 해가며 놀고 있다. 저 오리도 ‘에고(ego)’를 버리고 ‘공空’으로 저러고 있는 걸까. 흐르는 강을 보면 생각도 흐름을 만든다.

때로 한가하고 예민해질 때 강이 보이는 집은 우울하게도 한단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감정이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나 보다. 그럴 때는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놓아버리지 말고 ‘물’의 깊은 뜻을 헤아려봐야겠다. 물은 도움을 주고 이로움을 주면서도 내세우지 않으며 항상 낮은 곳에 머문다는 ‘물의 도道’를 떠올리면서…….

물과 사랑은 동질성인 것 같다.

물이 흐르고 흘러 모이듯이 사랑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꽃을 피우고,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가는 데서 같은 점이 많다. 물이 가진 넓고 깊은 성정은 사랑의 바탕이 된다. 그것의 겸손은 사랑의 실천과도 맥이 통할 것 같다. 그래서 맑은 물가는 영혼의 쉼터로 여겨진다.

그 강물에 석양이 비치니 아름다우면서도 한편 쓸쓸하다. 언젠가 석양빛을 받으며 바닷가에서 딸아이와 얘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그 장관을 바라보던 때가 그리워진다.

지금은 아이들이 멀리 떠나 둘만 남은 집이 휑뎅그렁하다. 아이들이 없으니 대화도 줄어들고 한정되어 TV에서 나는 소리와 오디오의 음악 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다닌다.

우리는 전화를 자주 건다. 이사온 후에 부쩍 더하다. 전화선을 통해 오는 가까운 사람의 말과 숨소리, 웃음으로 정적을 깨고 서로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쓴다. 소식을 전해 듣고 알리는 전화가 이제는 그리움을 잠재우고 덜어내는 기능으로 더 쓰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의 편지읽기부터 누른다. 딸은 부모의 궁금증과 걱정을 덜어주려고 저의 근황을 자세히 적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잘 지낸다고 썼지만, 돌아오면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아무 데도 안 나가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제 자신의 외로움도 큰가 보다. 베란다에서 기르는 화초들을 ‘베이비’라고 부르며 정을 붙이더니 이번에는 선물로 받은 맹인 안내견 얘기가 장황하다. 아들하고는 이메일보다는 자주 통화하면서 보고픈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화상 전화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어 다행스럽긴 하지만 따뜻한 손을 잡을 수가 없으니…….

겨울의 석양은 그 빛이 더 아름답다. 아마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이어서 인가 보다. 석양을 기다리듯이 바라보는 심정에는 빈 둥지인데다 계절 탓도 있으리라. 허전하지만 그렇다고 허무하지는 않다. 지는 해라고 아름다움을 잃은 것도 아니고 얼마 후면 다시 뜨는 것을. 그렇게 느껴진들 어떤가.

 

‘허무는 무한한 공간이다.

 공간은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있다.

 있다 그리고 없다.’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

석양의 아름다움을 아이들과 같이 보고 싶을 뿐이다. 오늘은 나도 석양과 채운이 물든 강가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마냥 젖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