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일

 

 

                                                                                            최병호

중학교 교문 앞을 지나다 보니 웬 ‘경고’판이 하나 새로 나붙어 있다. 이미 설치된 ‘운동장 개방 안내’판 옆에 제법 앙증스럽게 산뜻하다. ‘모든 교사校舍가 금연구역이라 특별히 흡연구역으로 지정된 장소 이외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때는 범칙금이 3만 원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덧붙여 ‘청소년에게 담배 판매 ─ 과태료 30만 원’ 이란 내용도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이미 ‘남교사 휴게실’이란 이름으로 흡연 코너를 운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법이 생기면서 규정된 범칙금 문제는, 그러므로 조용히 대내적으로 알리면 될 일이다. 더구나 과태료 문제는 담배 가게에 홍보해야 할 사항이지 학교 앞에 내걸 일이 아니지 않는가. 어찌 된 일인지 경고문에는 교사校舍 밖의 공간에 대해선 아무런 말이 없다. ‘개방 안내’에 따라 치러진 행사 끝의 꽁초 치다꺼리는, 그렇다면 여전히 학생들의 몫이란 말인가?

나는 담배를 피울 줄 모른다. 그러나 그 연기만은 사뭇 마셔 온 셈이다. 어릴 땐 어른들의 자연紫煙 속에서, 학창 시절과 교직 시절엔 친구들의 폭연暴煙 속에서 내내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TV의 홍보대로라면 나는 이른바 패시브 스모킹의 일대 피해자다. 아마도 나의 폐장은 그야말로 ‘황성옛터’가 돼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서 오는 무엄無嚴이 나로 하여금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경고판’에 눈길을 세우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청소년의 흡연율이 아무리 폭발적이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으로 선도해야 할 문제다. 경고판의 효과는 결국 탁상행정의 한 건 올리기 효과에 불과할 것이다.

담배는 일찍이 국가의 전매사업이었다. 지금도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생산은 더욱 활발하지 않나 싶다. 그 동안 수입도 자유로워졌다. 자치단체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기왕이면 국산 애호로 세수 확보에 협력해 달라고, 흡연을 사실상 부추겨왔다. 그러다가 별안간 담배가 아편이나 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금연을 외치고 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말인가.

언젠가 미국이 담뱃갑에 위해 경고를 써넣고 제 나라 국민에겐 금연을 권하고 우리에겐 그 수입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부조리를 몇 번이나 토악질했다. 그것도 하나의 선진한 덕성이던가? 이제 우리가 그걸 무슨 대단한 ‘노하우’나 된 것처럼 본뜨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담배가 해롭다면 먼저 남에겐 주지 말아야 하고 아예 만들지를 말아야 할 일이다.

나는 흡연의 깊은 맛을 모른다. 흡연자와 어울려 살아 왔을 뿐이다. 기쁘든 슬프든 화나든 즐겁든 감정이 격앙될 때면 그들은 예외 없이 한 개비씩 꼬나물었다. 푹 내뱉는 회백색 그림엔 언제나 크고 작은 멍울들이 촘촘히 배어 있었다.

답답하고 뭐라 말할 수 없이 매사가 권태로울 때, 그들은 권연을 새워 툭, 툭 다진 다음 불을 붙였다. 입 속 가득히 연기를 흔들다가 록, 록 하고 혀를 밖으로 차면 둥근 영상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환상처럼 스러졌다. 일종의 예연藝煙이라 할까. 직무에 임해선 그걸 물고 태워야 기안이 되고, 복명서가 되고, 문건이 매듭되는 그런 친구가 하나도 둘도 열도 아니었다.

나는 중2 때, 문예반 선생의 희한한 흡연 철학을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끽연을 일종의 수형受刑이라고 했다. 이룩해야 할 꿈을 이루지 못해 그 죄과로 하루 백 환百G의 벌금을 매기고 그것으로 ‘무궁화’ 담배 한 갑을 사서 연기로 날려 보낸다는 것이다.

흡연, 끽연, 쾌연, 예연, 애연, 폭연 등등, 그 어느 말에 해당이 되든 이를 이미 즐기고 있는 분들의 그 기호권嗜好權은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을 설 자리도 없이 몰아붙이면 그 정신적 피해는 과연 누가 보상해야 하는가. 육체적 피해만 보상의 대상이던가.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금연 교육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록 그들의 폐장이 ‘황성옛터’가 되었다 허더라도 그 ‘폐허에 서린 회포’를 보다 값진 것으로,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간직한다면 그걸 누가 어떻다고 풀이해야 할까. 아무래도 한 대 꼬나물고 긴 숨을 토하며 상량해 볼 일이 아닌가 한다.

나는 여전히 ‘연노설煙奴說’이니 ‘중독자’니 하는 진솔한 작품을 발표한 두 분의 작가가 “음, 나 금연했어. 내 돈 주고 담배 사는 일은 없어. 집에선 그러니까 언제나 푸른 하늘이지. 여기 나오면 권하는 것만 피워” 하고 만면에 웃음을 짓는 선배 작가와 함께 아련하게 그리는 자연紫煙의 분위기를 더없이 좋아한다. 흔연히 끼어 쨍 하고 유별난 인사를 되뇌곤 한다.

“오래간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