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에서 안면하다

 

 

                                                                                        최영자

여기는 안면도. 양광에 몸을 씻은 바다는 창창하고 파도가 어루만지고 간 백사장은 물결이 굽이지듯 주름지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젖은 모래는 하도 고와 마치 팥 앙금 같다. 나는 자불자불 올라왔다 자취 없이 사라져가는 파도와 장난을 치며 친구와 이야기에 빠져들어간다.

친구는 직장의 입사 동기로 인생의 초봄에 만났다. 정수리 주위에서부터 뒤통수 머리에 잔 빗질을 해서 볼륨 있게 꼭 잡아맨 긴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렸던 친구. 어떤 흔들림에도 넘어지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듯 꼿꼿한 자세는 바리케이트를 친 듯 거리를 두게 하지만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무엇이 있어 쉽게 친구가 되었다.

홍릉 골짜기 임업시험장의 잘 가꿔진 숲을 배경삼아 그녀가 ‘쟈니 기타’, ‘그 집 앞’ 등 장르를 넘나드는 노래를 부르면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들으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고 내 기분도 어루만지곤 했다. 친구는 발레를 무척 배우고 싶어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당시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다가올 우리 삶의 색깔을 짐작할 수 없어 불안했던 젊은 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배워 변화하려는 열정은 현실의 여건을 바꾸어보려고 몸과 마음을 들볶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 자유로울 수 있지만 아무것도 쉽게 결정할 수 없어 방황하였고, 그래서 쿵쿵 가슴 뛰었던 시간이라고 기억되는 세월이었다.

그러그러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친구는 말없이 다른 직장으로 가버렸다. 잘 알려진 외국인 회사였다. 그때 내 심정이 어떠 했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 동안의 관계를 지우개로 지우듯 잊어버릴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었으리라. 그렇게 떠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친구는 재능과 집념이 있었고, 당시에 우리는 늘 탈출구을 찾고 있었으니까. 그 애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그 친구를 삼 년 전 어떤 수필 세미나에서 만났다. 삼십여 년 만이다. 그녀는 이미 등단을 했고 나는 등단을 생각지도 않고 있을 때였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서로는 반갑기도 했지만, 나는 잠시 서먹한 느낌이 들었다. 새삼스러이 소리 없이 떠나버려 참담했던 기억이 스치면서 한 발 앞서간다는 막연한 질투 때문이었을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지만 삶이 바빴는지 마음이 멀었는지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친구가 다리가 되고 수필이 매개가 되어 간간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는 한순간의 의기투합으로 오늘 일박 이일의 봄 나들이를 나왔다.

떠날 때는 숙소에서 볼 수 있는 일몰을 만끽하려 했는데 이야기로 한 숨 돌리고 나니 해는 어느 사이 져버리고, 잠든 해를 품어안은 바다는 속이 거북한지 쉬지 않고 출렁이고 있었다. 이지러진 듯 둥근 달은 바다에 길을 내듯 비추고 우리의 가슴 속도 속속들이 밝혀주었다. 나는 먼저 왜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났으며 소식도 없었는가를 따지듯 물었다. 친구는 그 시절을 잊고 싶었노라고 했다.

각자, 나름의 각오로 세월을 헤쳐왔지만 돌아보면 촌스럽고 되돌려 다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안쓰럽고 쓸쓸한 감정들을 쏟아내며 허허 웃고 눈물을 찍어내며 또 웃었다. 소식을 모르고 지냈던 긴 세월은 맞주름 잡듯 접혀져 사라지고 새삼스러이 설명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는 그 옛날로 돌아가 버렸다. 건너뛴 시간 덕에 부끄러운 일들은 감출 수도 있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떨어져 사는 동안 친구와 나는 신기하게도 같은 길을 걸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종교를 가졌고, 교회 안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같은 활동을 비슷한 세월 동안 했다. 이제 글쓰기를 통하여 다시 만나고……. 부모의 슬하에 있을 때와는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되는 남편과의 인연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정점을 이뤘다.

친구는 남편이 너무 박학다식하여 시시콜콜 참견을 해서 괴롭다고 한다. 아는 만큼 남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나의 남편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헐렁해서 속이 터질 때가 많다.

“너, 그 사람이 박학다식해서 매력을 느낀 것 아냐?”

친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맞아, 맞아. 젊었을 때는 그랬어. 그러고 보니 네 남편도 공부하는 사람이잖아!”

“우리는 인생을 즐기며 살기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며… 그래서 남편까지도…….”

우리는 거품 반 술 반으로 맥주를 채운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과거의 사람과 만나 기억 속의 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새로 한 사람을 만나 네 식구가 된 삼십여 년의 세월을 몇 시간으로 되살리며 오늘의 나를 보았다. 이제 둘 다 까치발을 해가며 고개가 아프도록 기웃거릴 무엇도 없고, 왔던 자리로 돌아가는 태양과 같이 본향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인생의 석양에 서 있다.

옛날과 똑같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윤기 있게 느껴지는 것은 너른 바다 때문일까, 노을에 한 자락 적셔진 나이 탓에 내 마음이 푼푼해진 까닭일까. 안면도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와 보지 못한 일몰은 꿈속에서 보기로 하고 한 침대에서 서로의 코고는 소리를 자장가삼아 남은 여행을 떠난다.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근무.

<사계> 동인. <계간 수필>로 천료(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