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유머 오디세이

 

 

                                                                                         박장원

  

정성화의 ‘버드나무’는 품이 넓고도 그윽하다.

버들이 섬연(纖姸)한 가인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기품쯤으로 알았는데,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삶의 질고(疾苦)를 불러들이는 커다란 장터 사람으로 탈바꿈된 이미지의 포착이 두텁다. 저울 접시에 추를 얹어가며 세상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팔지 못한 고구마를 자루에 우두둑 도로 주워 담으면 금세 그의 덩치만 해지는 장돌뱅이의 뒷모습에서 우러나는 페이소스가 팽팽하다.

 

장터마다 새로 뿌리를 내려야 하는 장꾼들의 삶이란, 가지를 꺾어 땅에 꽂아놓기만 해도 얼마 안 있어 뿌리를 내리는 버드나무를 닮아야 했다. 그 바닥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가늘지만 잘 꺾이지 않는 버드나무 가지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거칠게 갈라져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보게 되면 ‘장돌뱅이’ 같은 그들 삶의 질곡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장터 한복판에 자리잡은 점포도 아닌 가정집이 싱겁다고 하지만, 인생의 염증과 통증을 잠재우는 아스피린 같은 존재로 버드나무는 그의 가슴속에서 입때껏 세파의 바람을 움키며 휘청휘청 푸른 빛으로 반짝이며 세찬 뿌리를 내리며 맑은 꽃을 피우고 있다. 버드나무의 자리가 유장한 것은 집요한 구상성과 매끈한 구성력에 기인하지만, 느닷없는 어느 시인의 흔한 구절에서는 순간 늘어진다.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로 끝까지 승부해야 하고, 때로는 오만도 부려야 한다.

 

최민자의 ‘깊이에 대하여’는 그리움이다.

우리들이 영원히 쫓겨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낙원이 바로 그리움이듯, 그는 무엇인가에 머물고 싶어 한다. 서성거리며 삶의 화소(畵素)를 차분하게 걸러 액정의 흐름을 다듬어내는 각오가 다부지다. 다만 시간이 빚어내는 유현(幽玄)에서 우러나는 그윽함을 좇으면서도, 깊이라는 것이 시간과 짝을 이루어 흘러가지 않는다며 체념을 앞세운다.

 

깊은 물은 흔들리지 않는다. 소리를 내어 흐르지도 않는다. 넉넉하고 고요한 물만이 하늘을 나는 새의 비상과 금빛 노을과 푸른 산그림자를 비추어낸다. 제 바닥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얕은 냇물에는 뜬구름인들 머물 리 없다. 한 자락 바람에도 물결이 이는 내 마음 바닥에 아득한 푸른 빛이 차오를 때까지 나는 얼마나 더 오래 어두워오는 강둑을 서성거려야 할까.

 

얼마나 더 오래 아득한 푸른 빛을 기다려야 하는가. 검정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로소 빛이 보인다고 했는데, 아무튼 ‘오래’는 깊은 영혼의 시간표요 마스터 플랜이다. 시선(詩仙) 이태백도 도리 없이 쇠뭉치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고, 인상파의 멤버 르노와르도 모든 색의 여왕이 검정이라는 것을 발견하는데 무려 40년이 필요했다. 아무튼 말은 삭아 없어지고 혼만 여울져 어리는 깊은 고독의 삶을 그는 그리워한다.

 

최성옥의 ‘어머니의 놋그릇’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어찌 보면 흔한 전개이다. 물려받은 방짜유기를 통해 시어머니를 회상하는 단순 구성인데, 이러한 흐름에서는 너나없이 각별한 결론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 틈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채송화의 색색과 단아한 생모시 한복의 치자 빛과 봉긋한 놋그릇에 어리던 노란 빛의 대비가 펑퍼짐하면서도 앙증맞다.

 

돌 틈 사이로 비집고 피어난 색색의 채송화 때문이었을까? 순간 시어머니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일어서서 아들과 손자에게 다가가시던 시어머니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내 손을 덥석 잡으시며 어머니의 눈에서는 촉촉한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얼른 앞장 서서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총총히 옮기셨다.

 

시어머니는 두 달 후 주무시듯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의 총총한 채송화는 돌 틈 사이로 스러졌겠지만, 올해도 대문 밖 돌계단 틈의 그 꽃들은 반드시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놋그릇에 스민’, ‘가문의 맥’으로 끝을 맺어 극적인 구조를 배제시켰지만, 놋그릇과 어머니를 연결시키는 감정의 충격을 적극적으로 활용만 한다면, 앞으로 그의 고적한 산문은 부드러운 가운데 날카롭기까지 할 것이다.

 

윤혜숙의 ‘아무 일도 안 하는 아버지’의 세월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침이면 열리지도 않은 대문’, ‘형님이 아버지가 된 셈입니다’, ‘논 가장자리에는 거두지 못해서 흩어진 팥알들이 여기저기’, ‘맨밥을 김에 싸서 먹습니다’ 그리고 ‘줄레줄레 따라가서 어머님 발 밑에 눕겠지요’ 같은 그의 시어 행간은 페이소스로 축축하다. 붉은 목단이 희미하게 닳아빠진 화투장처럼 빛바랜 얼굴로 누워 아무 일도 안 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너무나도 선명하다.

 

어머니는 콩밭에 나가 김을 매고 나는 땀이 줄줄 흐르는 어머니 곁에서 콩잎이 예쁘네, 가지 꽃이 예쁘네 하다가 지청구를 받기도 했습니다. 형님은 떡쌀을 이고 방앗간에 가면 나는 마루에 누워 파리를 쫓으며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님이 슬그머니 나오셔서 파리를 잡아주셨습니다.

 

인생사 저녁 그늘 같은 비애감이 어스레한 미소로 되살아난다. 바로 이 유머의 언저리가 전편에서 무리 없이 펼쳐지고 있다. 며느리는 대청마루에 벌러덩 누워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뒤척일 때, 이제는 아무 일도 안 하는 시아버지가 슬그머니 파리를 잡아주었다는 회상에서 웃음이 시나브로 번진다. 수필이 한낱 너절한 신변잡사라며 매도되지만, 탈속한 페이소스가 양념이요 고아한 유머가 고명 같은 산문이라면 그러한 일부의 지청구는 불식될 것이다.

 

현대 산문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중국의 욱달부(郁達夫)는 유머를 거론한다. ‘유머는 천성의 일종 취미(趣味)에 근원이 있는 것 같다. 영국 국민은 정치상이나 상업상에는 결코 유머를 쓰지 않지만 문학상에는 어느 작가나 모두 다소의 유머가 들어 있다. 초서, 셰익스피어, 로버트 린드, 버나드 쇼, 에이 밀른, 헉슬리 등이 엄중한 대 작품에서나 가벼운 단문에 흥이 사라질 때는 유머를 쓰게 된다. 그러면 자기의 반대론자도 얼굴을 가리고 웃고, 우수에 잠긴 사람도 눈물을 그치고 입을 벌려 웃게 된다’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유머를 다만 웃음에 국한시키고, 본질을 정확하게 거론하지는 못하였다.

수필은 유머에서 팽배해진다.

최상의 유머는 예리한 지성과 온후한 덕성이 겸비된 인격에서 우러나오되 인생을 십분 관조한 결과 생기는 순전(純全)한 웃음이며, 참된 자기를 알고 그러한 자기를 객관화시켜 웃을 수 있는 철학적 웃음이며, 단순한 골계나 문어적 수법의 풍자와도 달라 인간미와 진실성 위에 터 잡으면서 자연스레 뒤따르는 문학적 쾌락이니, 상대방의 급락에 따른 공격성 충족과 억압 욕구의 일시적 해발(解發) 및 프로이트적 성욕이 작용되는 코믹과 위트와는 엄격히 구분되고 있다.

유머가 분명 위트나 재담이나 패러디나 패러독스나 아이러니는 아니다. 그러기에 번갯불처럼 날카로운 빈정거림이나 금세 시들어버리는 웃음이 아니라, 잔잔한 미소이며 햇빛처럼 골고루 퍼지는 사랑인 것이다.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인간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연민의 정을 나타낸다. 유머 그 자체의 은폐된 근원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따라서 천국에는 유머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페이소스는 유머에서 꽃을 피운다. 정념을 억지로 추구하다가는 감정을 상하기 일쑤이고, 가슴을 축축이 적신다고 정감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페이소스는 유머로 가는 출발이며, 페이소스는 삶의 고독을 바탕으로 한다. 아무튼 페이소스는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만, 유머는 흔하지도 않고 빈번할 수도 없다. 누구라도 유머의 포착이 쉽지 않은 것이기에, 유머의 모습을 한 작품만에라도 번듯하게 새길 수 있다면 수필가로서의 행복일 것이다. 아이러니인지는 몰라도, 희극 속에 가장 슬픈 비극이 배어 있다고 한다. 작가는 바로 희극 속에 숨어 있는 비극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고독에서 시작하여 고독으로 끝나는 것이 삶인가.

수필은 발한적(發汗的) 외향성(外向性)이기보다는 관조적(觀照的) 내향성(內向性)에서야 제 빛을 찾는다고 한다. 때문에 수필은 고독의 소산이며, 이것이 싫으면 수필을 택하지 말라는 따끔한 아포리즘이 있다. 고독을 사이좋은 친구로 사귀지 못한 수필에서는 울림이 적고 번짐이 희미할 뿐이다.

<계간 수필> 2003년 가을호는 30편의 산문으로 사색의 장을 펼쳐나가는데, 페이소스와 유머가 빛을 발한다. 작은 반향일지는 몰라도, 정성화의 ‘버드나무’의 고독에서 우러나는 페이소스와 윤혜숙의 ‘아무 일도 안 하는 아버지’의 페이소스에서 피어나는 유머는 분명 영롱한 보석이다. 시장 한복판에 존재하는 버드나무의 풍미(風味)에는 세파를 거스르는 유연한 흐름이 배어 있고, 아무 일도 안 하는 아버지를 통한 삶의 애수(哀愁)에서 우러나는 독특한 향취(香趣)는 인생의 관조적 유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찰스 램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고독한 생장 과정에서도 심미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해한 천부적인 소질로 감상과 비애에 흐르지 않고 리얼한 묘사와 유머러스한 터치로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페이소스를 펼쳐놓았기에, 그의 모방자가 많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감흥을 재생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유머가 영국의 전유물은 아니다. 엄숙의 상징인 중국의 공자에게서 우러나는 유머가 최상급이라 하듯이, 그들에게는 그들의 페이소스가 존재하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머가 있을 것이다. 욱달부의 지적대로, 이런 정서에 근접하는 수필만이 문학의 항오(行伍)에서 우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