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

 

김기림의

 

‘길’

 

 

일 `시`:``2003년 8월 16일

장` 소`:`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 인원`:`문우회 회원 18명

사` 회`:`강호형

정` 리`:`최순희

 

 

<본문>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너머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사회`:`안녕하십니까. <계간 수필> 제34호, 2003년 겨울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 작품은 정지용과 함께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문학 이론의 기초를 세우며 우리 시단을 주도하다가 6·25전쟁 중에 납북된 시인 김기림(1908~?)의 수필, ‘길’입니다. 이 작품은 <월간 조선> 2000년 7월호의 별책 부록 ‘100인의 명사와 교사가 뽑은 한국의 명문’에 실린 17편의 수필 중 한 편입니다. 오늘은 최병호·변해명·최민자 선생, 이렇게 세 분께서 지정 토론을 해주시겠습니다. 먼저 변해명 선생께서 김기림 선생의 연보를 소개해 주십시오.

변해명`:`김기림 선생의 호는 편석촌片石村으로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4세인 1921년에 서울 보성고보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 입교立敎중학으로 옮겼으며, 1926년에 일본대학교 문학예술과에 입학합니다. 1930년 졸업과 함께 조선일보에 입사하고, 2년 후 결혼했으며, 29세이던 1936년에는 일본 동북대 영문과에 재입학하여 이 해에 첫 시집 『기상도』를 출간합니다. 1939년 두 번째 시집 『태양의 풍속』을 출간하고, 동북대를 졸업함과 함께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갔으나 폐간으로 낙향합니다. 1945년에 8·15 광복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 사대·연대·중앙대 등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39세이던 1946년에 세 번째 시집 『나비와 바다』를 출간하고, 그 이듬해에는 시론집 『시론』을 출간했으며, 1948년에는 네 번째 시집 『새노래』와 『과학개론』이란 역서를 발간합니다. 이 해에 수필집 『바다와 육체』를 평범사에서 출간하게 되지요. 43세이던 1950년에 『시의 이해』, 『문장론 신강』을 출간하나 6·25전쟁으로 납북됩니다. 오늘 합평 작품인 ‘길’은 1936년 <조광朝光>이란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다가 나중에 수필집 『바다와 육체』에 수록된 글입니다.

 

사회`:`수고하셨습니다. 김기림은 『바다와 육체』의 머리말에서 “수필이 가지는 매력은 무엇보다도 문장에 있다… 문학이라는 것은 필경 ‘언어’로써 되는 것이고, 언어의 온갖 ‘콤비네이션’이 문학이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앞서 이 수필이 100인의 명사와 교사들에 의해 명문으로 뽑혔다 했으니, 먼저 어떤 글이 명문인가를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명문이란 문장뿐 아니라 내용이 좋고 필자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길’도 그런 요건을 갖추었다고 보십니까?

최병호`:`편석촌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시절, 통계 투성이의 기삿거리도 그의 손에만 들어가면 재미있는 기사가 되어 나온다는 평을 들었고, 서정시 세계에서도 ‘땅뜨미’도 못하던 재목이 청신하고 정밀한 이미지로 수놓은 수판이 된다는 평을 들었던 탁월한 문장가였다고 합니다. 『바다와 육체』의 서문은 물론 나중에 나온 『문장론 신강』에서도 ‘진리를 가장하지 말라. 너무 경원하지도 말라. 진리는 소박할수록 좋다. 수월한 말로 말을 건너게 하라’라고 하여 역시 문장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이를 전제하고 읽어 보면, 소품이긴 하지만 ‘길’도 모더니즘의 기수다운 시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어휘 선택, 점층적인 구성 등이 ‘명문’이란 평에 동의하게 합니다.

내용면을 보면 ‘바다가 엿보이는 긴 언덕’은 고향 풍경의 특징을 압축·절제해서 보여주고 있고, 첫사랑 얘기라든지, ‘그 길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 노을에 젖어 돌아오곤 했다’는 구절이라든지, 끝 단락의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로 이어지는 점층적인 내용 전개와 언외에 담긴 정연한 세목들에서 ‘과학적인 시론’을 세우려 한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혼의 유무를 묻는다면, 삶의 변수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별달리 종교적·철학적 내용이 담기지도 않은 소품에 대해 ‘혼’을 들먹이는 것은 좀 과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각적 이미지로 전개된 정감에 그냥 가볍게 동의하는 정도면 어떨까요?

 

사회`:`최민자 선생께선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최민자`:`차분하고 애상적이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감각적인 문장들이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고 좋습니다. 이 글은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길의 이미지를 통해서 필자가 겪은 소년기의 상실감, 아픔, 그리움, 회한 등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변해명 선생께서 ‘김기림의 수필세계’란 글에서 지적하신 대로, 이 짧은 글 속에는 어느 장편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고, 어느 그림보다도 더 선연한 영상이 담겨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맞게 되는 이별의 아픔 같은, 인간 삶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상처들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 상실의 아픔을 감각적인 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그리움과 기다림, 슬픔을 혼에 실어서 독자들의 가슴에 맑은 슬픔 같은 어떤 울림을 남기는 글이기 때문에 명문으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고 봅니다.

변해명`:`‘명문’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글쓴이보다 글을 읽는 이가 평가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작가의 혼이 담겨 있는가, 독자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 작품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하는 것들이 잣대가 되겠지요. 원래 김기림의 주지주의는 자연발생적인 감상이나 감흥, 낭만 또는 전통적인 것에 대한 거부를 그 출발점으로 합니다. 모든 이미지를 객관적인 언어로 재구성하고, 그 이미지를 가장 잘 부각시킬 수 있는 언어 탁마에 고심하는 과학적 시학을 연구한 분입니다.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가 거미줄을 짜듯 정교한 얼개에 의해 극히 치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흔적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독자가 몰입하며 따라가게 되고, 짧은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명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길’이란 단지 길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여정을 의미하지요. ‘어머니의 상여’의 뒷모습조차 오래 지켜볼 수 없도록 꼬부라져 돌아간 길, 그 길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 조약돌처럼 잃어버린’ 첫사랑, 그렇게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 그 길에서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치고’,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고’,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와 이야기를 늙은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로 표현하고 있는 그의 언어 뒤에는 홀로 서 있는 인간 삶의 원초적인 고독과 허무와 근원적인 아픔이 모두 숨겨져 있단 말이지요. 그런 호소력 때문에 그 시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 독자들도 명문으로 평가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회`:`이 글이 명문이란 데는 대체로 다 동의하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는 이미지 부각에 치중한 글로서, 차라리 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는 줄 압니다. 이 글을 수필로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미지에 중점을 둔 이런 류의 글들이 많으나 ‘길’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수필이 아닌가 싶은데요.

최병호`:`편석촌의 모더니즘은 실패한 ‘구호’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과학정신과 객관주의를 외쳐 시의 근대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매우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었고, 또한 시인으로 비평가로 우리 문학사에 근대적 시론을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의 시나 시론을 읽어 보면 전통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없고 내면적 정신성도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단지 천박한 외국풍을 모더니즘이라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전래의 서정적 운율과 청각적 이미지는 무시하고 그럴듯한 시각적 이미지를 부각시켜, 새롭고 독특하고 재치 있긴 하지만 결국 ‘조각난 산문’을 쓰고 말았으며, 그 결과 그의 시와 산문은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산문인지 구별하기도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자주 비교 예시되는 글이 수필 ‘길’과 ‘강’이란 시인데, ‘길’이 ‘강’보다 오히려 더 짧고 시적인 분위기는 훨씬 더 짙습니다. 시적으로 응축된 내용이 행간에 구메구메 함유되어 있어서 이런 소품에서 시와 수필 사이의 경계를 짓는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최민자`:`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더니 이 작품을 시로 분류해 놓고 시낭송 코너에까지 올려놓은 사이트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의 시를 ‘조각난 산문’이라 했던 어떤 평자의 말대로, 필자는 시다 수필이다 구분하지 않고 문학이란 것은 일단 삶의 체험이나 감성을 고도의 함축성으로 이미지화하여 표현해 내는 언어예술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글의 길이가 짧고 문장도 회화적이어서 다소 혼선이 오긴 하지만 필자가 수필로 발표했으면 수필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시와 수필을 나눈다는 자체가 편의성을 추구하는 인위적인 경계이고 보면, 시가 꼭 이미지로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수필이 반드시 이야기 형식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저는 시를 잘 모르지만 이 글은 짧기는 해도 메타포라든지 함축미 같은, 시로서의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는 듯싶고, 산문에 가까운 호흡으로 썼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수필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데, 특히 서정수필의 경우에는 상상력과 이미지를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면에서, 앞으로 우리가 지향하고 연구해야 할 수필의 전형으로서도 뛰어난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변해명`:`김기림은 1936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와 현실’이란 평론을 통해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인용하여 장시에 대한 필연적인 요구를 피력한 바 있는데, 이 해에 나온 처녀 시집 『기상도』의 시들은 수필 ‘길’보다 모두 더 깁니다. 시든 수필이든 그는 길이에는 개의치 않았던가, 아니면 장르의 해체를 의도적으로 실험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 작품을 수필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수필집 『바다와 육체』에 수록된 글이기 때문이지요.

 

사회`:`거기 말고도 대부분의 옛 수필전집에는 다 실려 있는 작품입니다. 『바다와 육체』에 39편이 실렸고, 1988년에 나온 『김기림 전집』에도 59편이 실려 있으니 수필도 꽤 많이 쓰신 편입니다.

이 ‘길’이란 수필은 원고지 2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품입니다. 이런 짧은 수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독자와 필자의 입장에서 두루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합니다.

최병호`:`어느 수필지에서는 5매 수필난을 따로 마련하고 있고, 5매 수필만으로 묶은 동인지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수필 길이는 통상 원고지 15장 내외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군더더기가 많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소재에 따라 짧게 쓸 수도 있고, 짧게 응축하면 할수록 시에 가깝게 되겠지요. 시든 수필이든 ‘문학’이란 이름으로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최민자`:`저도 5매 수필만 모아놓은 동인지를 읽어 본 적이 있는데, 간결하고 깔끔한 맛이 좋았습니다. 저도 이런 수필을 쓰고는 싶은데 짧게 쓸 재주가 없기 때문에 길게 늘여 쓰고 있거든요.(웃음) 짧은 글로 자신의 심중을 다 나타내려면 우선 문장이 고도로 수련되어야 하고,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혜안이 필요하겠지요. 길이를 압축하다 보면 잎을 다 떨구고 뼈대로만 서 있는 겨울나무 같은 골계미, 혹은 ‘세한도’ 같은 그림에서 맛보는 것 같은 어떤 문향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경구적인 내용일 때는 촌철살인의 강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야기 형식의 서사적인 수필이 줄 수 있는 점진적인 설득력이라든지, 살진 활엽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감흥은 아무래도 좀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회`:`쓸 능력만 있다면 길이에 구애받을 필요 없다, 이거죠?

최민자`:`소재에 따라 각기 적합한 길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변해명`:`시는 암송하지만 수필을 암송하는 경우는 드물지요. 그런데도 많은 문인이나 독자들이 이 ‘길’은 시를 외우듯 즐겨 외우고 있었고, 저도 예전에는 외웠습니다. 시를 외우면 이미지, 상상력, 언어 절제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지요. 이 수필도 그런 총체적인 문학성을 집약하여 나온 글이기 때문에 문장에 대해 별로 공부를 하지 않고 수필의 문학성이 결여되어 가는 요즈음, 수필의 산문성을 좀더 정돈하자는 맥락에서도 꼭 이런 길이가 아니더라도 배울 점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그럼 토론을 객석으로 돌리겠습니다. 먼저 회장님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허세욱`:`시냐 수필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명나라 때의 유명한 평론가에 오교吳喬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시론 중에 ‘위로시화圍爐詩話’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이론을 빌리면 쌀이란 소재를 두고 말했다. 즉 쌀로 밥을 지을 수도 있고 술을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밥은 산문이고 술은 물론 시를 말하는 것으로, 이로써 외형적인 문제와 본질적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었다 하여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반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외형이 그리 잘 갖춰지지 않고 해성하다거나 밀도가 약하고 응축이 안 됐다 하여 나쁜 건 아니며 그로써도 충분히 가치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라는 입장이었습니다. 한편 그 동안의 문학 이론은 ‘시가 오래 가면 산문화되고, 산문이 오래 가면 시문화된다’고 하는 것이었지요. 이에 비추어 볼 때 앞서 ‘길’이 시냐 수필이냐 했는데, 저는 수필은 역시 수필이되 단, 시적인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묘사에 이미지가 많이 동원되긴 했으나, 어머니를 여읜 일이라든지, 첫사랑을 잃었다든지 하는 개체의 실제 사실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한문에서는 소설도 2, 3줄짜리가 많고 산문은 더 많습니다. 길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김병권`:`저는 절제와 함축의 표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 수필의 길이를 줄이자는 운동이 상당히 번져가고 있는 추세인데, 변화의 바람과 일치하는 글이라 좋은 인상을 가졌습니다.

고봉진`:`수필로 발표한 글이니 수필임엔 틀림없겠으나, 자신의 개인사를 전달한 수필로는 썩 좋은 글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까 어느 분은 문장력이 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했으나, 저는 만약 문장력이 된다면 이렇게 쓰고 싶지 않습니다.(웃음) 수필은 발생 때부터 어느 정도의 모양새 같은 게 있고, 그 속에는 소설이나 시가 다룰 수 없는 깊은 철학적 사색 등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지 문학으로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유혜자`:`그래도 저는 문장력만 된다면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웃음) 수필에 자화상적인 측면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시적으로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읽었습니다.

남기수`:`첫 3문단은 함축된 밀도가 ‘길’로서 괜찮은 편입니다. 4, 5번째 문단은 앞에 비해 밀도가 덜하고 우선 스타일이 다릅니다. 절제미와 시적인 압축미는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내용면이 상징주의적인 기법을 써서 적당한 투명도를 가진 천을 덮어 독자로 하여금 마음껏 상상하게 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얼핏 보면 아름다우나 천착해 보면 남는 게 별로 없고 공허하지요. 앞서 고봉진 선생 말씀대로 이미지 문학에 수필적 사색을 충분히 담을 수 있겠느냐 했을 때, 만약 그 내용에 삶의 예지가 번득인다면 문장의 길이나 작품 전체의 길이에 관계없이 돋보이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한낱 재주 피우기에 지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시헌`:`저는 세 번, 네 번 읽을수록 맛이 있었습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수필인가 싶었는데, 시적인 요소가 강한 중에도 수필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도입부에서 어머니를 여읜 이야기를 해놓고, 그 다음엔 첫사랑 이야기에 이어 풍경 이야기를 걸쳐 넣어 인생무상을 말하고, 끝에 가선 이 전부를 종합하고 있지요. 객관적 요소가 감성적 요소보다 강할 때 수필적이 되는데, 이런 요소가 상당히 있습니다.

송규호`:`시적 수필보다는 ‘시수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필이 시를 닮은 게 아니라 시가 수필을 닮은 쪽이라고 보는데, 나도 10대 후반에는 이런 글을 많이 썼었지요. 스피드 미학을 추구하는 이 시대엔 장차 수필도 비록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나 이런 식의 시수필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임순`:`최근에 4, 5매짜리 수필 청탁을 더러 받는데 그럴 때 한 전범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0여 년 전에 쓰여진 시적인 수필 작품을 합평하면서, 저는 이런 글이 우리 수필가들에게 던지는 화두가 무엇이 될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김기림은 『바다와 육체』 머리말에서 앞으로 수필은 ‘종횡무진한 시대적 총아’가 될 거라고 단언했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쓰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경은`:`이 글을 읽는 초심자들의 반응은 아마 두 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형식을 타파함으로써 수필의 지평이 넓어졌다는 것과 수필 문장 속에 자기 체험을 객관화하는 데 혼란이 올 수도 있겠다는 점입니다. 장편掌篇소설 같은 수필이 될 수 있을지요? 또 형식면에서 수필적이기보다는 시적인데, 원문에도 행갈이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사회`:`다른 책에도 다 이렇게 한 행씩 띈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고봉진`:`김기림처럼 이미지를 중시한 사람들은 행갈이를 중요시 했습니다. 원래 이렇습니다.

주연아`:`기다림과 슬픔, 외로움 등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을 드러내는 원형적 이미지가 길이란 상징적 매개체를 통해 시적으로 잘 형상화되었다고 봅니다. 저는 인터넷 시대의 수필 대중화의 한 방법으로 이와 같은 장편수필의 낭송을 생각해 봤습니다. 원고지 5장 정도로 더욱 탄탄한 구성을 갖추고 간결한 문체로써 압축미에 여운의 미까지 갖춘다면, 낭송에 있어서도 시와도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영`:`서정수필에선 이런 정도의 비유법을 쓰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여운이 긴 글이었습니다.

이경은`:`공감각적인 심상이 단박 느껴지지요. 문장이 짧으니까 그렇지 긴 문장이라면 안 먹혔을 것 같아요.

 

사회`:`‘호져’라는 말은 사전에 안 나오던데, 혹시 찾으신 분 계십니까.

김병권`:`어휘가 상당히 문제가 많던데요. ‘호져’란 혹시 ‘홀려’란 말이 아닐까요? 도입부의 ‘엿보이는’도 훔쳐보는 것도 아닌데 좀 어색하고요.

허세욱`:`‘옆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정도의 뜻이 아닐까요?

고봉진`:`‘모래둔’도 그렇지요.

 

사회`:`60여 년 전의 글이니 그간 어휘에 상당한 변화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김기림의 ‘길’을 함께 읽어 보았습니다. 김태길 명예회장님께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김태길`:`40대 후반자의 글이라는 느낌을 가졌는데 작가가 아직 20대에 쓴 글이라니 놀라웠습니다. 천재라는 느낌이 듭니다. 20대 천재가 쓴 글을 두고 80대 둔재가 소감을 말하자니 어줍기 짝이 없습니다.(웃음)

 

사회`:`이것으로 오늘 합평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