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海 하늘에서

 

 

                                                                                고임순

  

사람들은 하늘 밑에 살면서 얼마나 하늘을 알고 있는 것일까. 맑게 갠 하늘, 흰구름 뜬 하늘, 먹구름 끼고 비내리는 하늘, 천둥 번개로 폭우 퍼붓는 하늘, 그리고 노을지는 하늘과 별과 달이 뜨는 밤하늘.

비행기에 올라 높이 날으면 손에 잡힐 듯한 하늘을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신비의 베일에 가리워져 영원한 불가사의의 세계임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살아온 만큼 보이는 하늘은 땅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일들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지난 5월 27일, 북위 50도의 런던에서 60도의 오슬로를 향하여 북해를 넘었다. 갈 때는 대낮이었고 돌아올 때는 한밤중이었다. 3,500피트 상공에서 만난 북국의 낮과 밤하늘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고 환상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았던 신비한 색조가 내 뇌리에 각인되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티 하나 없이 맑게 갠 오후 2시의 북해 하늘은 진한 옥빛이었다. 바다 또한 같은 빛이어서 수평선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눈을 맑게 씻어주는 무한대의 옥빛 누리가 나를 자꾸만 원점인 고향으로 끌고 갔다.

옥빛. 세상의 문을 열던 유년 시절, 나들이 가시는 어머니의 옥빛 모시치마의 정갈함에 경이의 눈을 떴었다. 세상에 저렇게 고운 빛이 또 있을까. 가슴 설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옛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물처럼 밀려왔다.

어머니는 학부모 회의 때나 한약방에 가실 때는 꼭 이 옷을 입으셨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 머리를 곱게 쪽지고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옥색치마가 얼마나 황홀하고 자랑스러웠던가. 목청을 돋우던 선생의 일본 말이 그 빛에 굴절(屈折)되어 허공에 맴돌고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병치레만 하던 선병질(腺病質)인 나는 자주 어머니 치마를 붙들고 비실거리며 한약방에 갔었다. 원래 울보에 심약했던 나는 여름 내내 밥을 먹지 못해 어머니 마음을 많이 썩혀드렸다. 의사의 큰 손이 꼬챙이 같은 내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면 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어머니는 옥빛 치마폭으로 나를 감싸주셨다.

그 시리도록 곱던 빛으로 하여 나는 철이 들고 오늘까지 꿈을 가꾸며 살았는지 모른다. 어머니 치마폭이 하늘만큼 넓어서 그 속에 감싸여 소리 없이 살 수 있었는지도. 세월이 가도 녹슬지 않는 추억들이다.

3박 4일의 노르웨이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밤하늘과 만났다. 대낮의 옥빛이 사그라지지 않았음인지 푸른 빛을 품어대고 있는 밤하늘이 참으로 영묘했다.

열 시 반쯤 기창으로 밖을 응시한다.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 같은 광원선(光源線)으로 내 두 눈은 저녁 노을을 포착한다. 이글이글 타던 태양의 알몸이 시나브로 녹아드는 하늘은 진홍의 불바다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오렌지와 보랏빛으로 물든 구름이 점점 황토빛과 잿빛으로 번져나 농담이 절묘한 이 한 폭의 수채화가 상상의 날개를 펴든다. 해는 지면서 어쩌면 저토록 강렬하게 자기를 드러내는가.

진홍(眞紅)빛. 이 빛은 사람이 이름 붙인 첫번째 색이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색이름으로 우리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힘과 생명의 상징인 이 태초의 빛은 단순한 불빛이 아니다. 한나절 화염을 토하고 불가마 아궁이 속에서 완전 연소한 육송 통나무 숯불 빛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아픈 상처의 빛깔이기도 했다.

작년 고희 기념 서예전시회 날, 나는 분홍 저고리를 입었다. 전시작품 31점을 분실한 충격으로 쓰러진 나를 일으켜 준 빛. 천연염색가인 제자가 오직 나를 위해 멕시코산 선인장의 코치닐벌레의 동물성 염료로 명주 비단에 눈부시는 진홍빛을 살려냈다. 그 정성의 저고리로 내 가슴의 상처를 덮어 마음까지 따뜻하게 물들여 준 것이다.

어느덧 자정이 되자 시시각각 초읽기로 태양이 사라지는 장엄한 순간을 맞는다. 무거운 쇳덩이가 풍덩 하고 바다 속으로 빠지듯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몰日沒. 해가 마지막 토해 낸 한 줄기 빛으로 물든 환상적인 오렌지 빛 구름만이 전송가를 부르듯 유영하는 모습이 애잔하다. 마치 한평생 뜨거운 사랑으로 남을 위해 온몸 불사르고 자기를 버리는 숭고한 생애 앞에서처럼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소멸하는 모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슬픈 것인가. 마지막 구름 한 점마저도 마침내 노을빛 그림자 속으로 스러져가자 하늘은 칠흑의 공간으로 변했다. 이 세상 모든 빛을 삼켜버린 하늘은 조용히 무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앞좌석에서 칭얼대던 어린 아기가 악을 쓰고 울기 시작했다. 해돋이의 고고성인가, 황혼의 울음은 조용히 안으로 삼켜야 한다. 나처럼 오열을 가슴속에서만 출렁이게 하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쉼없이 돌면서 이루는 해돋이와 낙조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우리 인생도 종국에는 태어났던 원점으로 돌아가는 돌고 도는 원(圓)인 것을. 자기 삶의 마지막을 맨 처음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곳은 한 달 후면 24시간 어둠이 없는 완전 백야(白夜)를 이룬다고 한다.

 

‘어둠은 빛의 그림자`/`빛은 어둠의 반영`/`낮이 있었는지 이것이 밤인지`/`우리는 무엇인가의`/`어렴풋한 꿈은 아닌지.’

소피아 파르노크의 ‘백야’의 시를 떠올리며 나는 꿈꾸듯 런던 공항에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