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마지막 조건

 

 

                                                                                  홍혜랑

  

아무 때고 러시아 문학에 한 번 푹 빠져본 후에 러시아 문학기행에 나서리라 마음먹었었지만 뜻밖에 일찍 러시아 여행의 기회를 잡고 보니 마음이 달라진다. 명품을 볼 줄 모른다고 손에 들어온 명품을 마다 할 사람이 있을까.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3시간쯤 달리니 조그만 도시 툴라가 나온다. 시내를 관통해서 외곽으로 빠진 버스는 이내 자작나무가 울창한 농장 앞에 멈춰 선다. 이미 톨스토이의 작품집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농장 입구의 양쪽 기둥 앞에 서니 전설의 땅을 밟는 듯한 신비감마저 든다. 이곳 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농장 안에는 그의 생가가 있고, 그가 영면하고 있는 안택도 있다.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셰익스피어지만 전문가에게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들에겐 ‘셰익스피어주의’라는 말은 생소하다. 독일 국민이 괴테를 아무리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괴테주의란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톨스토이즘이라는 용어가 러시아 문학 속에서 태어나게 된 까닭을 나는 이번 러시아 문학기행에서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독일 문학에서 괴테와 실러가 그러하듯 러시아 문학에서 흔히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파트너가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더라도 인간의 실존에 대한 심리분석이 예리하고도 사실적이라는 면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오히려 톨스토이보다 더 주목을 끄는 작가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유럽 실존주의 문학의 원조라고 부르며 유럽의 많은 작가들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하여 가히 미신적 존경심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통틀어서 도스토예프스키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으면서 고아가 된 톨스토이는 숙모에게서 양육되다가 숙모마저 타계하자 다시 고모에게 넘겨진다. 그의 청소년 시절이 얼마나 암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전기작가 비류꼬푸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나는 젊었을 때 무척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특히 두 가지 사건이 지금도 내 마음에 걸리네. 자네는 나의 전기를 쓸 때 그 사건들을 꼭 넣어야 하네. 그 하나는 내가 결혼 전에 우리 집 소작인의 여자와 관계를 가진 일인데 이미 단편 『악마』에서 어느 정도 암시를 했네. 그리고 또 하나는 숙모님 댁에 있던 가샤라는 하녀를 건드린 죄일세. 그녀는 순결한 처녀였는데 내가 유혹했기 때문에 숙모님에게 쫓겨나서 몸을 망쳐버리고 말았네.”

굳이 전기작가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톨스토이의 마지막 장편소설 『부활』에 나오는 카추샤와 네플류도프가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된 작중인물인지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문호 로맹 롤랑이 일찍이 『부활』을 ‘톨스토이의 유언서’라고 말한 것도 음미할 만한 표현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쓴 때는 언제 이승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작가의 나이 72세 때였으니, 로맹 롤랑의 말대로 『부활』은 소설이기 이전에 작가의 결연한 참회로 쓰여진 유언서인 셈이다.

그러나 범부에서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소리내어 남에게 고백하진 않는다. 문호 톨스토이에게도 자신의 전기작가에게마저 고백할 수 없는 또 다른 가책이 남아 있었던 걸까. 온통 기독교 성경의 인용문으로 가득 차 있는 『부활』의 마지막 장면은 흔히들 말하듯 보기에 따라서는 작품의 문학성에 오히려 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여행 중에, 톨스토이에게 문학보다 더 절실한 관심은 종교적 삶이었고, 종교나 사상보다 더 절박한 선택은 실천적 삶 자체였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야스나야 폴랴나의 농장 한 모퉁이에, 안내자의 안내가 없으면 그것이 무덤이란 것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애련한 톨스토이의 유택 앞에서였다. 높디 높은 자작나무 아래라서 그런지 평지의 무덤이 가라앉듯 낮아 보인다. 신 앞에 자신을 낮추고 낮추던 고인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일까.

흔히 고인의 얼굴을 조각해 넣는 서양식의 돌비석도 없고, 망자의 이름이 적힌 손바닥만한 돌 하나도 없다. 관 모양을 흉내낸 작디 작은 잔디틀이 무덤의 전부다. 고인이 자신의 무덤에 허락한 것은 오로지 관 모서리에 꽂혀 있는 꽃 한 송이뿐이었다. 무덤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표현하기 어려운 전율 같은 것이 혈관을 타고 돈다. 수없는 관광객이 줄을 잇지만 그 무덤 앞에서만은 구경꾼이 아니다. 눈으로 읽을 비문이 없으니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들 중엔 역사 속에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화려한 비문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역사로부터 떳떳하게 초대를 받지 못했는데도 기어이 역사의 대문을 비집고 들어서기 위해서 안달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한 인간을, 그리고 한 인간의 생애를 단 몇 줄의 비문에 담아낼 수 있는 언어가 있긴 있는 걸까.

농장 안에 보존되고 있는 하얀 이층 목조 건물은 톨스토이의 생가이자 그가 수많은 작품을 쏟아낸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톨스토이가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살았다는 이 고택은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지만 옹색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이층으로 오르는 좁은 계단에는 조상 때부터 사용했다는 대형 벽시계가 270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역사를 달리고 있다. 세월의 흐름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쓰던 침대나 그가 입던 옷은 너무나 소박하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이미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터라 작품에 대한 원고료나 인세가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부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의 삶은 수도자처럼 검약했던 것같다.

그의 나이 60이 되기 전에 이미 자신의 모든 사유재산을 포기하려 하자 16세 연하인 부인 소피아와 의견 대립이 생겼고, 그로 인해서 결국 자신의 모든 저작권을 아내에게 양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자신의 실천적 삶 사이의 괴리에서 오랜 세월 고뇌했던 것 같다. 몇 차례 가출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의 나이 82세이던 1910년 10월 28일 새벽 아내에게 마지막 글을 남기고 주치의와 함께 집을 나선다. 그러나 집 나간 지 사흘 만에 병을 얻어 조그만 시골역 아스타포보의 역장 관사에서 11월 7일 영면한다. 결국 집 나간 지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평상시 유언대로 농장의 자작나무길 모퉁이에서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왜소하게 누워 있는 것이다.

세기적 대 문호는 왜 그토록 높은 자작나무 밑에 그토록 낮게 눕기를 원했을까. 인간은 누구나 70년, 80년 생애 동안 지은 죄를 몽땅 털어내고 천사의 몸으로 이승을 떠나는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톨스토이도 작품 『부활』을 끝내지 못한 채 그대로 가슴에 안고 영원 속으로 떠나갔다면 그는 오늘도 여전히 『부활』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부활은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기적이 아니라, 살아 생전 못다 한 참회를 무덤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일 그것이 곧 부활의 징조일 진대, 살아 있는 사람 마음대로 무덤 가를 어지럽히는 일은 곧 망자의 부활을 방해하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문학이 문학의 범주에 머물러 있지 않고 왜 톨스토이즘이라는 문학 밖의 정신세계에까지 확대되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