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

 

 

                                                                                     홍정기

  

감겨지는 눈을 겨우 뜨고 버스 트랩에 발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내려선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열이 있는 몸을 휘감는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다.

바로 앞서 내린, 머리 뒤가 가르마진 지친 가장이 아내의 반가운 마중으로 한결 경쾌해진 듯 피곤을 구두 뒤축으로 털어낸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아내의 말에, 짐짓 바지 주머니에 찔렀던 손을 슬그머니 빼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향한다. 점점 멀어지던 둘은 한 덩이 어둠의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뒤늦게 대학원생이 된 난, 오늘 신입생 신고식으로 젊은이들과 어우러진 하루로 들뜬 기분이다. 저녁밥을 짓고 이제나저제나 문 밖을 기웃거릴 남편이 있는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버스에서 막 내린 지친 몸이지만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아파트 빌딩 숲 위, 별이 반짝이는 창공을 향해 살아 움직였던 하루를 고하듯이, 얼레에 되감기는 연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구두 소리가 조용한 밤 공기를 울린다.

아직 취기가 남은 머릿속 필름은 타임머신을 탄다.

여중생 서넛이 책상 위에 도화지를 놓고 둘러앉아 무수히 점을 찍는다. 또닥또닥, 툭툭, 타다닥……. 난타의 점이 가득 찍혀지고 시합 준비를 마친다. 모두 활과 창 대신 대자와 연필을 들었다. 단단한 모습이 이길 기세들이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한다. 진 사람이 먼저 하는, 경우가 다른 게임이다. 점을 선으로 이으면서 삼각형을 먼저 만든 사람이 자신의 번호를 적고 개수를 더해 간다. 남긴 점 없이 모두 선으로 이어지면 게임은 끝나고 삼각형 수가 많은 사람이 이긴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머리를 써야 하지만 반은 운이다. 인생 승부의 패를 그대로 닮고 있다. 인생에서도 자신에게 이을 점을 정해 선을 만들고 줄다리기를 해서 자신 쪽으로 넘어오게 하면 이긴다.

경마의 기수가 애마의 머리를 쓰다듬고 키스를 하며 “오늘도 힘껏 알았지. 난 널 믿어.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키스를 하고 멋진 폼으로 땅을 차고 승마한다. 고삐를 힘주어 잡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많은 관중 앞에 나타난다. 그들이 환호하며 자신의 표 번호가 같다며, 기수와 말을 향해서 염원의 마음을 담은 열망의 몸을 앞으로 쏠리듯 내밀며 손을 마구 흔든다. 경마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는 것에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 것이 자신의 전부가 된다. 관중들의 머리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도 볼 만한 구경거리다.

모든 구기운동을 보면 공을 잘 연결해야 승리를 거두지만, 점과 선으로 승패를 가림은 바둑과 당구에서 경지를 이룬다.

바둑 대결을 벌이는 두 사람의 머릿속은 무수한 선을 잇기에 골몰하다. 누가 많은 선들을 제대로 이어가며 집을 많이 확보하는가의 치열한 경쟁이다. 우리네 삶은 경쟁이고 비슷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치열해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생을 담은 것에 매달려 사는 모습도 닮은꼴이다.

당구의 승부는 마무리 스리 쿠션에 달려 있다. 고수들은 스리 쿠션으로만 경쟁을 벌이는 경우를 본다. 정확한 에너지를 실은 시구 공이 첫 공을 맞추고 세 번의 쿠션으로 이어져 마지막 공을 맞춰야 성공하는 게임이다. 머릿속에서 계산한 선을 잘 풀어나갔기에 승리를 거둔 선수는 상금과 성취감을 함께 거둔다.

모든 시합은 눈과 머리를 써서 승부를 가리지만, 반대로 사각지대를 닮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찌할까. 운명의 여신이 휘두르는 힘 앞에서 작아지는 인간이지만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내려진 정의들은 사각지대를 풀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인간은 언제나 문제를 풀기 위해 고심하는 존재이니까. 학문의 기본은 국어가 아니고 수학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점과 선에 인생패가 들어 있음을 깨달은 것은 결혼에 대해 고심할 때이다. 이런저런 생각 중에서 엉뚱한 생각은, 내가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따라서 연결되는 배우자가 다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 대 사람의 일이 중요하다는 것에 이의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그 중에서도 배우자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지금도 ‘내가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과 했겠지. 그럼 그 사람의 부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거고……. 그럼 난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처럼 만남은 전부를 확인할 수 없는 도미노로 연결된다.

모든 사물에서도 A가 C를 선택하면 B는 C를 선택할 수 없고 D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어느 경우이든 선택은 연결 고리로 이루어진다.

살아가노라면 수없이 많은 상대가 시시각각 변하며 욕구의 장이 되어 다가오고 들어선다. 그들은 주인의 선택에 따라서 자리매김도 하고 곧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인생을 좌우하는 많은 갈래의 길 위에 서서 서성이나 보다.

아침 기지개를 켜며 가뿐한 몸으로 깨어난 오늘도 내 생애로 점철되어질 하루이기에 소중하게 보내리라.

 

 

 

<현대수필>로 등단. 국학자료원 전문위원.

자전 에세이 『메기와 청어』, 테마 에세이 『뉘』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