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애기 젖멕이러 가요

 

 

                                                                                      김수봉

  

애기는 칭얼대다 한 차례 울더니 잠이 들었다. 띠 받쳐 업은 애기가 더 무거워졌다. 애기는 고개가 젖혀지고 팔다리는 늘어져 디룽거린다. 잔솔밭을 다 지나고 고개를 넘어야 엄니는 보일 거다. 애기를 업은 일곱 살 오빠도 배가 고팠다.

억새 숲에서 풀무치가 푸르르, 때때시(딱따깨비)는 때때때때 하며 날아간다. 이런 동무라도 없다면 무섬증이 드는 초가을 한낮이다. 어쩌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숲 속의 정적을 깨줄 때도 있지만 숲길은 너무 적막하다. 애기가 잠이라도 안 자면 이름도 불러주며 옹알거리게 해서 휘휘한 줄 모를 텐데.

엄니는 이른 아침, 영보네 텃골밭으로 간다며 단단히 일렀다. 애기 울리지 말고, 화님이 때리지 말고, 배고프면 감자 쪄둔 것 내려 먹고, 두 번째 기차 가는 소리가 들리면 애기 업고 밭으로 오라고…….

엄니는 여름 내내 품앗이 밭 매는 날이 많았다. 그래야 가을걷이를 할 때 놉꾼들을 함께 모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나는 삼 남매의 맏이였다. 아직 국민학교(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일곱 살, 내 아래로는 다섯 살과 두 살배기의 여동생이 있었다. B29라는 비행기가 일본 땅을 폭격하기 한 해 전이었으니, 오늘에서 보면 아스라한 추억이다.

아버지는 새벽같이 논으로 가서 호락질로 논 매기를 해야 하므로 낮참에 잠깐 들러 점심만 먹고 다시 논으로 간다. 집에 남아서 애기를 보는 일은 자연 내 몫이었다. 정말 지겨웠지만 아버지의 영令이 무서웠고 엄니의 간곡한 말이 나를 어쩔 수 없게 했다. 그리고 그때의 아이들은 거개가 그랬다. 조금 더 크면 들일도 나가야 했으니까.

그 날도 아버지가 점심을 드시러 바쁘게 사립문을 들어서며 “너 아직 안 갔구나. 에끼놈!” 하고는 애기를 들쳐 업혀줄 때에야 늦은 것을 알았다. 동생 화님이 하고 공기놀이에 팔려서 기차 가는 소리를 못 들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품앗이하러 간 곳이 어디냐에 따라 젖먹이러 가는 길은 달랐다. 어떤 날은 논둑길도 가고, 오솔길도 가고, 개울도 건너는 때가 있다. 그 날은 잔솔밭길이었다.

늘어진 애기가 더 무거워진다. 타박타박 발걸음도 무겁다. 좀 쉬었다 갔으면 싶은데 늦은 판에 그럴 수도 없다.

언덕을 거의 다 넘어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흰 머릿수건을 쓴 한배할매가 진둥걸음으로 올라온다. 내 앞에 이르자 “어디 가냐?” 한다. 묻지 않아도 알 일이련만 그렇게 말을 건네줘야 한다고 어른들은 알기 때문이다.

“울애기 젖멕이러 가요.”

힘없는 내 목소리엔 아랑곳 않고 “어여 가그라. 느 엄니 눈빠지겄다”  하고는 호미 든 손을 휘저으며 간다.

엄니는 내가 비치자 콩밭 이랑에서 황새처럼 목을 길게 뽑아올려 나를 본다. 그리고는 다시 엎드려 더 빨리 밭을 매간다. 내가 밭두렁에 당도할 때까지 매가던 이랑을 마저 끝내야만 한다는 듯.

등에서 애기를 빼앗다시피 안아 내리더니 잠도 덜 깬 애기 입에 젖꼭지부터 물리고는 밭두렁에 앉았다. 그리고 묻는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 점심 드시러 왔더냐, 감자는 먹었느냐, 애기 오줌 몇 번 뉘었냐, 화님이가 또 흙 먹디야? 나는 엄니 곁에 앉은 채 ‘응, 응’으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왜 늦었느냐고 다그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나는 땡볕이 내려쬐는 콩밭으로 눈길을 돌리며 밭 매는 다른 엄니들을 헤아려 본다. 넷 다섯 여섯, 이 날은 여섯 명이 줄맞추기 하듯 앉아서 밭을 매나가고 있었다. 텃골밭은 크기도 했다.

새참은 이미 먹어버린 뒤고, 낮밥은 아직 주인네 집에서 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낮밥이 얼른 와서 주인 아줌니가 “아가, 너도 밥 먹고 가라”했으면 싶었다. 엄니는 그냥 가라고 눈을 찔끔대겠지만 못이기는 척 앉아서 얻어먹을 수도 있을 텐데, 반찬으론 갈치조림이나 고등어 자반도 있을 텐데.

밥은 오지 않았다. 엄니가 애기 젖을 다 먹이고 나서 서둘러 다시 업혀주었다. 그리고 하얗게 젖이 묻은 애기 입술을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이거 가져가서 바구리에 잘 담아놔라. 엄니가 또 잡아다가 저녁에 맛있게 구워줄 텐께” 하더니 엄니는 마술사처럼 방아깨비 네 마리를 꺼내었다. 두 마리는 옷고름에서, 쪽머리에서 한 마리, 머릿수건 속에서 또 한 마리를.

밭을 매다가 방아깨비가 보이면 얼른 잡아선 넣어둘 곳이 마땅찮다 보니 옷고름과 쪽머리 새에 꽂아넣는 것이다. 가을 메뚜기나 방아깨비는 알이 통통 배서 아궁잇불에 노릿노릿 구워내면 맛이 그만이었다.

엄니는 방아깨비 네 마리를 그냥 내 손에 쥐어주려다 밭두렁에서 강아지풀 줄기 하나를 쑥 뽑아 그것을 꿰미삼아 줄줄이 꿰어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또 일렀다.

“해찰하지 말고 핑 가잉. 화님이 흙 못 먹게 하고, 밥바구리 내려서 화님이랑 함께 밥 먹고잉.”

내가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서자 엄니는 바삐 밭이랑으로 다시 들어갔다. 눈물이 펑 쏟아지려는 것을 ‘끅’ 소리 한 번으로 참아 넘겼다. 그리고 방아깨비를 들여다보았다. 긴 뒷다리는 다 떼어 내버린 채였다. 방아깨비 뒷다리를 잡고 방아찧기 놀이라도 하며 가면 좋을 건데…….

화님이 생각을 하기로 했다. 고 계집애는 꼭 흙을 먹었다. 그리고 내 애를 먹였다. 흙담의 황토 흙을 손톱으로 호비작거려서는 입에 바르면서 먹기도 하고, 언젠가는 불 꺼진 아궁이에서 숯조각을 주워먹고 입이 새까맣게 되기도 했다. ‘계집애, 이참에는 숯먹은 것까지 엄니한테 다 이른다고 을러대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아까 눈물이 나려던 일이 말짱해졌다.

엄마 젖을 잘 먹고 엄마 냄새도 많이 맡아서인지 애기는 등에서 뭐라고 옹알거리다가 발버둥을 쳐대기도 한다.

잔솔밭을 지나올 때는 꾀꼬리 두 마리가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노란 털만큼이나 아름답게 금빛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 전, 한 신문기사를 읽고 있다가 번개처럼 스쳐가는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보았다.

‘화장실서 젖 짜고 냉장고 찾아 발 동동’이라는 제(題)하에 아직도 현대의 직장 여성, 엄마들이 직장에서 출산 휴가나 육아 보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나는 50여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우리 어머니를 오늘의 직장에 앉아 있게 하고, 현대의 여성들을 어머니의 콩밭에 앉혀 보았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똑같다는 생각이었다. 불어난 젖을 보고 아기를 생각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아기를 업고 젖먹이러 와 주는 사람이 있었던 그 시대의 우리 어머니는 그나마 행복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