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구파인가

 

 

                                                                                     金鎭植

  

내가 수구파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갓 대학을 들어간 막내로부터였다. 대학신문의 기자로 뽑혀 수련을 받고 있다길래 대견스럽기도 하고, 무슨 도움말이라도 줄 수 있을까 하여 자리를 마련하였다. 자연히 세상 돌아가는 일이 화제가 되었고, 당시 세상을 바꾸겠다고 앞장서는 사람들이 안티조선을 내세우며 기세를 올릴 때인지라 그 저변도 짚어가며 걸러가고 싶었다.

안티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가 먼저 물었다. 막내의 대답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가 과제로 주어져 써 갔는데 선배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까닭인즉 반통일 수구신문에 대해 너무 호의적이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도 놓쳤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새로운 과제를 받았는데, 뒷날 평양을 방문하여 어디엔가 참배하고 헷갈리는 서명을 하여 남남 갈등을 일으킨 그 교수의 저서를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었다. 아직 세상을 겪어보지 못한 막내가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막내가 비판받은 까닭을 잘못 전달하지 않았을 테고, 지금 주어진 과제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다. 나도 강의랍시고 대학을 들락거리며 눈을 의심케 하는 온갖 구호를 보아왔고, 신문을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기성세대의 모순에 반항하는 젊은이의 순수한 의기(意氣)쯤으로 지나치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막내와 대화를 나누면서 대학 내의 실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들 학생들의 활동이 순수한 자발성에 기반을 두지 않음을 새삼 확인하였다고 할까. 그들은 치밀한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며 이념공동체를 추구하는 듯이 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아들놈에게 ‘당장 그만 두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제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듯하여 차마 그렇게 윽박지르지는 못하였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그런 뜻을 말 가운데서 은연히 내비치기도 했으며, 설령 버틴다고 하더라도 군 입대 등으로 2학기 이상을 넘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마음의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을 안심시키며 갈등이나 좌절에서 받을 수 있는 자존심의 상처를 다독거리며 치우친 생각들을 잡아주고 싶었다. 장학금의 환불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고, 기질이나 풍토가 맞지 않으면 빨리 결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등 당면한 문제를 비롯하여 편향된 독서의 해독에 대한 충고까지 곁들였다.

그러나 스스로 지망한 일이니 조금 더 버텨보겠다며, 오히려 애비를 염려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이야기를 밖에 나가 하다가는 수구파로 점 찍혀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막내는 그 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듯이 보였다. 기자라는 직분에 얼마간 장학금의 혜택까지 따른다니 긍지와 실리를 위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아들을 통하여 학생기자가 되는 수련 과정을 지켜보며 너무 앞서 가거나 과격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선배 기자를 따라 시위나 농성 현장을 찾기도 하고, 과제로 주어진 진보적 성향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빠져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만큼의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무슨 일이 생긴 듯하였다. 갑자기 고교 때 친구와 며칠간 여행을 하기로 했으니, 학교 신문사에서 전화가 오면 집안 일로 시골에 심부름을 간 것으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고, 더욱이 개강 기간이라 의아하게 여겼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날 딸아이를 통하여 사정을 듣고 여행한 까닭을 대강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한총련인가 하는 학생조직의 발대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거기에 선발되어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들어보니 그런 것 같았고, 지금까지 밝힌 일은 없지만 그런 줄 알고 있다. 그 기간, 학교 신문사에서의 전화는 불이 났다고밖에 할 수 없다. 내키지 않은 일을 떳떳하게 넘긴 것은 아니지만 애비로서는 내심 반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선배 기자들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던 것 같고, 방학을 맞아 누나의 초청으로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결단을 각오한 듯이 보였다. 방학 중 학생기자의 수련 프로그램이 있어 참여해야 된다며, 해외여행의 허락을 받지 못해 애태우다가 출국이 임박해서야 가파르게 뜻을 이루었다. 해외여행 중에 40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조건부였다. 책의 목록이 지정되어 있었고, 대부분 진보적 성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사흘에 두 권씩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인데, 순리로 주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여행을 하지 않고 골방에 박혀서 요사이 누가 했다는 말처럼 ‘악랄하게’ 읽고 쓰고 한다 하더라도 달포 정도의 기간에 해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막내는 이 과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해외 나들이를 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를 턱이 없었다. 이미 학생기자를 그만 둘 각오를 하고 물어내어야 할 장학금의 액수까지 셈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하던 일의 매듭을 짓고 그만 둘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기다리는 참이라 환영의 뜻을 나타내었음은 물론이다.

막내는 그렇게 하였다. 외국에서 돌아와 한 달쯤인가 신문사 일을 본 다음 학생기자의 옷을 벗었다. 비록 초심의 각오가 꺾인 것은 사실이지만, 반목하며 앓고 있는 현장에서 이 시대의 빛과 그림자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면 그 또한 소득이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부모의 영향력이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택은 결국 스스로 한 것이다. 막내는 장학금을 물어내면서 부모에게 부담을 지운 것이 개운치 않았을 것이고, 초지初志가 꺾인 아픔을 맛보았겠지만 부모로서는 좀 안전한 곳으로 구해 낸 것 같아 마음이 놓였음도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새벽이면 눈을 비비면서 변함 없이 조선일보를 사랑하고, 퇴근 길이면 가판대에서 동아일보를 집는다.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며, 그들이 모두 낡은 껍질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구파란 말인가. 세상 일을 단정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기도 어렵고, 이런저런 색깔에 대해서도 굳이 분별하고 싶지 않지만 순리를 생각하고 더불어 어울릴 수 있는 지혜를 깨쳐갈 수는 없을까.

이 글을 마감하려는데 병영생활을 하고 있는 막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월말께나 다음 달 초순에 휴가를 나온다고 한다. 그때 물어볼 생각이다. 아직도 애비를 수구파로 생각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