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

 

 

                                                                                     정목일

  

글을 한 편 쓰면 아내나 아이들에게 슬며시 한 번 읽길 청한다. 반응을 보고 싶어서이다. 영국의 대시인 실러도 밤새워 한 편의 시를 쓰면 가정부에게 읽게 하고 소감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시를 모르는 가정부가 비평가의 안목일 수는 없으나 가정부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시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몇 번이나 고쳐 썼다고 한다.

가족에게 글을 한 번 읽어주길 청할 때, 첫번째 독자라고 생각하기는커녕 갑자기 심드렁한 기색을 보이거나 난색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기분이 좋을 리 만무하다. 우격다짐으로 글을 읽어봐 달라고 사정하기도 곤란하여 포기해 버린 지 오래다. 어떤 때는 눈치를 살펴가며 슬그머니 원고를 내놓고 표정을 살피지만 너무나 사무적인 태도로 “괜찮다”, “그저 그렇다”는 등의 말을 뱉어내고 얼른 자리를 피하고 만다. 섭섭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제 글을 잘 봐주지 않는다고 화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적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께서 들뜬 목소리로 “이리 와 보거라. 난초꽃이 피었어!” 하고 감격에 겨워 손뼉을 치면서 환호하셨다. 나와 아내는 난초 화분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예쁘네요”라고 말해 주었을 뿐 더 이상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를 돌아보시며 섭섭하신 듯했다.

내가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아내와 백화점에 가는 일이다. 양복을 한 벌 사야 할 경우엔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가서 옷을 골라야 하는데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몇 개의 점포를 들러야 하고, 옷을 입어보고 벗어야 하는 일, 유행과 색깔과 개성 따위를 따지는 일에 그만 지쳐버리고 만다. 어떤 때는 양복 한 벌을 사는 동안 기분이 축 늘어져 죽을 맛이 되기도 하고, 말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또 그릇점에서 사지도 않으면서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있을 땐 ‘남자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민망하고 쑥스러워진다. 꾹 참고 기다려보지만 더 이상 앞에 서 있기도 서먹하고 무료해서 찻집에 가 있겠다는 말을 하곤 자리를 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만 빠져 타인의 일에 무관심하기가 일쑤다. 타인이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가져주길 원하면서도 타인의 일엔 냉담하거나 관심 밖이다.

내가 밤새워 글 한 편을 써주고 자존심도 버리고 한 번 읽어봐 주길 간청하는 것을 식구들이 외면해도 무심하다고 여길 일도 아니다. 내가 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 밤중에 홀로 집중력을 불어넣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어머니께서 정성을 다해 난초를 길러왔으니 꽃이 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날마다 난초를 보면서 시름을 달래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한 송이 꽃을 피우고자 하셨다.

난초꽃을 보시고 환호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으로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기 때문이다. 일 년 만에 꽃망울을 터뜨린 것을 보고서 혼자 보기가 아까워 식구들에게 함께 보자고 했던 것이다.

아내가 백화점 그릇점에서 발을 멈추고 눈빛을 반짝이며 오래 머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에 드는 그릇들을 발견하면서 속으로 탁자 위에 놓아 보고, 그 위에 음식을 담고, 같이 있을 사람들을 그려보는 순간이다. 도자기 그릇들을 보면서 식구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행복감에 잠기는 것이다. 그래서 값이 얼마나 비싼지, 우리 형편에 무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콤한 행복감을 사고 싶어한다. 나도 이런 마음을 짐작하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하곤 했다.

살아가면서 마음을 나타내는데 인색하고 무관심할 때가 많다. 가족들이 어쩌다 내 원고를 읽어주면서 내키지는 않아도 가끔씩 감탄을 발하고, 이런 대목엔 이랬으면 어떨까? 슬며시 관심을 나타내 준다면 얼마나 위로를 받을 것인가.

난초꽃을 피운 팔순 노모에게 “어머니, 축하해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이런 감탄 섞인 인사말을 한 번 건네지 못한 것이 송구스럽고 민망할 뿐이다. 어머니 생전에 왜 그런 마음이 열리지 않았단 말인가. 감탄해야 할 순간인데도 무관심하였던 일이 두고두고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미처 몰랐다.

백화점에 같이 가자는 아내의 말을 이젠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그릇점에 오래 머물면 “찻잔이 우아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련다.

사랑은 무관심이 아니라 공감의 발견이 아닌가. 공감과 감탄이 있어야 사랑이 꽃피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