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休息)에 대하여

 

 

                                                                                                  정진권

 

하늘이 있고 바다가 있고 그 중간에 산이 있다.

 

산에 앉아 하늘을 우러르면 하늘은 아득히 높다. 나는 그곳에 이르고 싶었지만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산에 앉아 바다 속을 헤아리면 바다는 아득히 깊다. 나는 그곳에 이르고 싶었지만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어차피 하늘은 나에게 너무 높고,

 

어차피 바다는 나에게 너무 깊어,

 

중간쯤

 

혼자 앉아서

 

술이나 한 잔 쭉 드네.

 

─ 필자, ‘산봉(山峰)에 혼자 앉아서’ 제2연. 1991

 

 

하늘과 바다 그 중간, 나는 산이 편했던가 보다.

 

남들은 다 꿈꾸는 하늘인데, 다 꿈꾸는 바다인데, 그리고 거기 이르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왜 50대 그 자신만만한 나이에 이런 체념(諦念)을 했을까? 도전(挑戰)이 두려워서였다. 한두 살씩 나이를 더하면서 자신의 처지(處地)나 역량(力量)을 너무 잘 알았고, 그리하여 무모(無謀)하다 싶은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순(矛盾)이 하나 드러난다. 내가 정말로 하늘도 바다도 다 체념하고 다만 산이 편했다면, 나는 그 산봉우리에 “혼자 앉아서 술이나 한 잔 쭉” 드는데 머물러야(止)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자족(自足)이 없었다. 지금도 없다. 시(詩)에서 말한 것은 한낱 내 희망(希望)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마음먹은 하늘도 바다도 없이, 애써 피하려 했던 그 무모한 일도 더러는 저지르면서, 변변치 못한 호구지책(糊口之策), 그래도 가르치고 연구하고 글 쓰는 사람이랍시고 속으로 바라온 약간의 명성(名聲,) 별것도 아닌 애증(愛憎), 이런 것들에 얽매여 정신 없이 세파(世波)를 타고 동서(東西)로 분주(奔走)했다. 하늘이나 바다를 꿈꾸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들이 다 하찮게 보였겠지만, 나는 힘들 때가 많았다.

 

정년(停年)을 얼만가 앞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늘 하는 대로 화장실엘 갔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여느 때와 달리 퍽도 피곤해 보였다. 문득 옛날에 쓴 글 한 편이 떠올라 곧 책을 찾아 펼쳐보았다. 같은 화장실, 같은 거울에 비친 어느 날 한밤중의…….

 

 

아, 나의 얼굴, 나의 얼굴은 피로와 권태와 짜증, 그리고 불안과 각박함으로 굳어 있었다.

 

“아니, 이것이 내 얼굴이라니!”

 

나는 그때까지 그처럼 몹쓸 나의 얼굴을 본 일이 없다.

 

─ 『얼굴과 마음』, 1979

 

 

1979년이면 내 나이 40대 초반이다. 그때도 나는 퍽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은 젊은 나이여서 쉴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하다. 나는 책을 덮으면서 이제는 정말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 누군가의 말소리가 산 속에 메아리 울리듯 내 귓속에 울려왔다.

 

“쉬어야겠다고? 무얼 했다고 쉬어? 금방 정년이야. 그러면 쉴 일밖에 더 있니? 제발 피곤한 척하지 마라.”

 

나는 2000년 8월에 정년을 맞았다. 그러나 2년을 더 학교에 남아 강의실을 들락거리고, 또 어느 낯선 문화센터 수필 교실엘 나가 무얼 가르친다며 떠들고, 그 동안 읽고 썼던 것들 정리해서 책이랍시고 몇 권씩을 이어내고, 그러다 보니 정년 후에도 쉴 겨를이 없었다. 아니, 쉬며 불안해서 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등바등 동분서주하던 나는 지난 2003년 8월 10일, 마침내 몸에 이상을 느끼고 서울대 병원에 들어가 수술을 받았다. 뇌출혈이었다. 충분히 쉴 시간을 주어도 못 쉬는 사람……. 문병온 사람들이 말했다.

 

“자네, 일중독증이야. 좀 쉬어. 서두르지 말고.”

 

“선생님, 그 동안 너무 일밖에 모르셨어요. 이번 일을 경고(警告)로 아시고 푹 쉬세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다 쉬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이처럼 한가하게 누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무시로 가슴을 짓눌렀다. 교정 볼 일, 강의할 일, 쓰다 둔 원고 끝낼 일, 그 동안 쓴 글들 새로 고쳐 쓸 일, 또 무슨 무슨 끊임없는 그 일들……. 그러다 좀 잊을 만하면 이번에는 또 지난날에 보고 듣고 겪고 읽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마치 심술처럼 다가와 나를 들깨웠다. 그럴 때 문득 문득 옛 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스스로 몸을 쉬는(息形) 자는 비록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그 형상이 고목과 같을지라도 마음 속으로는 분주하게 내닫는 수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을 쉬는(息形) 자는 그 속이 맑고 비어 사물에 초연하므로 산림(山林)엘 가든 조정(朝廷)엘 가든 시장(市場)엘 가든 쉼 아님이 없다.

 

─ 이숭인(李崇仁), 『송식암유방서(送息庵遊方序)』

 

 

 

 

대체 그 속이 맑고 비어 사물에 초연하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지금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장소에 구애받기 때문(井蛙 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處也`─`莊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몸도 스스로 못 쉬는 내가 스스로 마음을 쉬는 자의 세계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병상에서조차 마음 한 번 비울 수 없는 내가 나는 적이 딱했다.

 

퇴원한 지 어느덧 반 년이다. 그 동안도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그러나 이제는 못 쉰다 해서 자신을 딱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쉬면 오히려 불안한 사람,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끊임없이 이어 해야 편안한 사람, 그렇다면 일이 곧 쉼인데 달리 무슨 쉼을 바라겠는가? 다만 그 일이라는 것이 어느 한 군데도 변변한 데가 없어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