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임군의 죽음

 

 

                                                                                            朴在植

 

임군이 죽은 것은 어느 재벌 총수가 자살로 죽어 세상이 떠들썩한 가운데 장사를 치른 지 며칠쯤 지나서이다. 세인의 이목을 비상하게 모으고 간 재벌 총수의 죽음과 명색이 없는 나의 노우(老友) 임군의 죽음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같은 시기에 매우 대조적인 터수의 두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사실이 친구를 애도하는 마음에 우연찮게 겹쳐서 떠올랐을 뿐이다.

 

임군은 부산 변두리에 있는 삼간 누옥에서 신양으로 몸져 누운 노처를 혼자서 수발들다가 돌연히 발증한 뇌경색으로 쓰러져 하룻밤을 못 넘기고 가고 말았다. 고희도 중반이나 지났으니 짜장 비명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멀쩡히 곁에서 시중들던 빈사의 병처를 두고 갑자기 죽었으니 나로서는 생때같은 부음이 아닐 수 없다.

 

지난 봄, 꽤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평소에는 피차가 무심한 편이어서 실없는 안부 전화 따위 오가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그 날 따라 생각이 내켜, 내가 서울 가까이 이사도 왔으니 한번 올라오지 않겠느냐고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러자 얼마큼 탈기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안 그래도 니가 보고 싶기도 해서 봄에는 꼭 갈라꼬 했는데, 할마이한테 붙잡혀 지금은 꼼짝 못한다”는 것이었다.

 

“왜 또 니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나?” 하니까, “그기 아이고, 그놈의 당뇨병이 도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며칠 전에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암만해도 죽지 싶다. 똥 오점도 내가 받아내고 안 있나”고 했다.

 

“당뇨병이야 아는 병인데 별일 있겠나. 아무튼 니가 속도 많이 썩혔으니까 이런 때 속죄하는 셈치고 열심히 돌보고 나은 담에 다시 연락하기로 하자” 하고 대수롭잖게 전화를 끊었다.

 

이것이 오활하게도 평소 과장벽이 있는 그의 말투에 미루어 (그가 죽은 다음에 안 일이지만) 정작으로 합병증까지 생겨 위중했던 병자의 병세를 예사로만 여겼던 나의 어설픈 우정이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수작이 되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5년쯤 전의 일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충북의 산골 집에 그가 표연히 찾아온 것이다. 그 몇 해 전에 다른 친구와 함께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새삼 집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기에, 왜 미리 전화를 걸고 오지 않고 그랬냐니까, 급하게 집을 나오는 바람에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놓고 와서 못했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나오다니?”

 

무슨 곡절인가 싶어 정색으로 물었더니 그 어이없는 사연에 아내와 나는 배꼽을 잡고 말았다.

 

“할마이가 자식들한테 갖다 줄끼라고 집에 젓을 담아 안 놓나. 이놈들이 쬐끔씩 보내주는 생활비 값을 한다고 말이다. 며칠 전에 그걸 손질해서 노나 담는다고 창꼬에 있는 놈을 나더러 갖다 달라캐서 젓독을 들고 나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 엎어지는 바람에 독이 와장창 깨져 젓이 양 사방에 흩어지고 내 옷도 젓 칠갑이 됐는데 이걸 우짜노. 할마이한테 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데. 이런 때 삼십육계밖에는 무슨 방법이 있겠노. 할마이 모르게 방으로 기어들어가서 얼른 옷을 갈아 입고 집에서 나와 버렸지.”

 

그러고는 수삼 일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내 생각이 나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하여간 잘 왔다. 나하고 술이나 실컷 먹고 여기서 며칠 놀다가 맘이 잡히면 데려가서 싹싹 빌어라. 설마 잡아먹기야 하겠냐.”

 

짐짓 농조로 눙치면서도 생래의 동안에 그 새 노티가 짙게 잡힌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소시 때는 언제나 무소외(無所畏)의 패기로 매사에 군림하기가 일쑤이던 그가 어느 새 왜소한 지아비로 늙은 모습이 왠지 슬픈 아이러니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하루도 묵지 못하고 당일 밤으로 부산에 되돌아가야 했다. 술이 거나하게 되자, “그래도 궁금해 할 터이니 집에 전화를 걸라”는 나의 권유를 못 이겨 시뜻이 잡은 수화기에 뜻밖에도 그의 맏형의 부보(訃報)가 전해져 온 것이다. “하필이면!” 하고 낙담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짧은 해후가 그와의 마지막 작별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때의 아쉬움이 이제금 애틋하게 되살아난다.

 

임군은 나의 고교 시절의 단짝 친구이다. 친구가 단짝이 되는 동기와 과정의 심리적 배경에는 으레 취미나 성격 또는 지적인 지향성 같은 뭔가 서로가 투합할 수 있는 상통되는 요소가 게재하게 마련인데, 임군과 나 사이에는 그런 꼬투리가 전무하다시피 한 친구이다. 그런데도 그와 나는 거의 숙명적이라고 할 만큼 숙친해졌다. 그것이 무엇에 연유하는 우정인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으나, 그의 소탈하면서도 곡진한 우애의 표시가 선병질적인 나의 감수성을 사로잡았고, 그런 나를 그는 무작정 좋아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죽음의 병으로 치부되던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증상은 초기였지만 내가 비관적인 심사를 내비치면 그는 길길이 뛰는 시늉으로 화를 냈다.

 

“니가 와 죽노! 내가 있는데. 나만 믿고 그깟 병 잊어버리라 안 카더나.”

 

그리고는 집이 가까이 있는데도 밤에는 우정 우리 집에 와서 궁싯거리다가 같은 이불 속에서 함께 자곤 했다. “그러다 병이 옮으면 어쩔래” 하면, “자, 내 입에 대고 후우 불어 봐라” 하고는 입을 한껏 벌려 내 입 앞에 내밀고 자발 없이 웃었다. 그런 그가 때로는 제법 진지한 장담조의 어투로 두 사람의 장래를 점치기도 했다.

 

“두고 봐라. 니는 문학가가 될끼고 나는 큰 사업가 될끼다. 사장실 옆에 니 방을 맹글어 니는 책이나 읽고 글만 쓰면 된다. 내가 미기 살릴끼니까” 했지만, 그 꿈은 싹수도 틔워보지 못하고 식근을 쫓아 전전하는 소시민의 신세로 빛 없는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내가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차 가족과 함께 고향인 시골로 이사 가는 날 그는 밤새 주룩주룩 울었다. 이윽고 나는 서울에서, 그는 부산에 붙박이로 터전을 잡고 내내 떨어져 살았으니 이따금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나 옛 정을 나눈 것이 고작일 뿐으로 어언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그냥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사바 세계에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이란 과연 있는 것인지, 생각하면 새삼 허망하기만 하다.

 

임군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의 영안실은 미상불 썰렁했다. 두 아들 상주가 무료하게 지키고 선 빈소는 하루를 세웠는데도 그 새 다녀간 조객의 수는 방명록에 한 장을 못 채우고 척박하게 놓여 있다. 그나마 상주의 몫일 터가 분명한 것은 생전에는 술과 친구를 좋아한 그였지만 죽으면 친구가 없는 것이 시쳇 노인의 죽음이다. 며칠 전 TV에서 본 재벌 총수의 화사한 그것과는 너무도 왕청되다는 부질없는 가늠에 마음이 실없이 착잡하기도 하다.

 

영전에 놓인 추면백발(皺面白髮)의 사진이 사뭇 낯설었다. 내가 늘 간직한 그의 모습은 학교 시절의 그 천진한 동안이니 그럴 수밖에. 그 모습을 유영에 곁들이며 “니가 와 죽노! 내가 있는데” 하는 목소리를 되새기는 나의 눈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러운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