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부재중인가요

 

 

                                                                                            유혜자

 

퇴직 후 얼마 동안은 집에 있는 날이 많아서 바깥의 소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중에도 우리 아파트 같은 라인의 두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들이 주인 없는 빈 집에서 낑낑거리고 신음하다가 짖어대는 소리가 거슬렸다. 3층집의 강아지는 세 살까지 다른 집에서 키우던 것을 데려왔고, 다른 집은 어미에게서 젖 먹던 것을 떼어와서 길렀다. 3층집의 강아지는 먼저 주인이 그리워서인지 칭얼거리고, 새끼 때부터 기른 한 집의 강아지는 피붙이보다 더한 사랑으로 안고 쓰다듬던 주인이 집에 없어서일까. 자기네 집 앞이 아니고 아파트의 현관에만 누가 들어서도 낌새를 채고 짖었다. 사람끼리의 만남처럼 개와 사람의 만남에도 어떤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두 강아지는 어쩌다가 낮에 집을 비우는 주인들을 만났을까. 사람처럼 출근할 때 남편이 들려준 ‘사랑해’ 한 마디를 생각하며 종일토록 행복감에 젖을 수 없는 강아지들이 아닌가.

 

처음에는 개들이 도둑을 지키는 본능에서 짖어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의지했던 주인들이 집을 나가고 나면 쓸쓸해져서 칭얼대는 듯했다. 집을 옮겨온 한 집의 강아지는 혹시 먼저 주인이 함께 산책해 주던 풋풋한 풀밭과 싱싱한 흙 냄새가 아쉬울까. 아니면 공원의 광장을 달리고 싶은 것일까.

 

강아지들에게 지나간 일을 세세히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강아지 소리를 들으며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기도 했다. 냇물에서 바위 틈으로 숨던 송사리를 잡으려던 유년 시절부터 허덕이던 직장 시절까지. 직장생활에 얽매어 있을 때는 내 의지대로 스스로 계획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아쉬워 강아지들처럼 낑낑거리며 자유가 없다고 불평을 했다. 그런데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지니까 불평하던 시절이 좋았다고 생각되었다. 크게 한 고개를 넘어온 다음에는 어떤 삶이 주어질지 씩씩한 마음보다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었다. 생각과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무능하고 무기력한 세월만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와락 겁이 나기도 했었다.

 

한편 이런 생각을 쫓으려고 한때는 동네 산이나 공원에 가서 산책을 했다. 공원에는 애완견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보며 빈 집에서 낑낑거리는 강아지들은 집안에서 용변을 안 보는 훈련을 시켜놔서 용변을 보고 싶은 신호인가 짐작도 해 보았다. 미국에서 살다온 친구의 얘기로는 한낮에 남의 집 애완견을 돌봐주는 직업인이 있다 한다. 직장에 나가거나 노쇠한 주인의 개들을 맡아 용변도 보게 하고 산책도 시켜준다는 것이다.

 

같은 지붕을 이고 여러 세대가 사는 아파트가 내게 맞는 집인가 하는 초기의 의문은 잊은 지 오래지만, 나처럼 강아지들도 주인과 집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불만일까. 공간이 불편하다기보다 좀더 따뜻한 가족과 함께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싶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개들이 짖는 것은 자신을 외부에 열어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짖으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것을 알려주고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자신에 대한 주인의 무관심에 항의하고, 아니면 자신이 아직도 짖을 줄 안다고 틈틈이 연습하며 과시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 비극이란 무관심인 것 같다. 개들도 자기의 실존을 과시하며 주인과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다. 개를 키우는 한 집은 학원에 나가는 학생과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청년 형제가 살고 있다. 그들에게도 강아지가 주인을 기다리느라 문가에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소망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를 권하고 싶다. 물론 인터넷으로 정보를 전하고 받고 하겠지만 이웃에도 자신의 존재, 실력을 알리고 인정을 나누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은 함께 나누는 진실한 관계의 힘이라고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더위를 식히려고 공원에 나갔던 여름날, 벤치에 앉아서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에 취해 있는데 잎새 넓은 나뭇가지 사이로 매미 한 마리가 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의 매미가 굼벵이로 18년인가의 세월을 보내고 한여름 2주 동안을 살고 노래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문득 나와 매미와의 만남이 소중하듯이, 층層이야 다르지만 한 지붕 밑에 사는 강아지야말로 귀한 만남이 아닌가. 애처로운 소리도 인정에 대한 갈증이 심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이 측은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뒤엔 강아지 짖는 소리가 조용해지면 한편 궁금해진다. 지쳐서 잠들었을까. 그렇잖으면 그들이 분수를 알고 조용히 하는 것일까. 혼자만의 시간은 의미가 없고 살아 있는 시간은 주인과 함께 하는 시간뿐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침묵하고 있는지.

 

사람들도 혼자 견디는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 가는 추세이다. 외부의 세계와 통로가 단절된 섬이라는 공간에 살지 않더라도 마주치는 고독, 아니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자의식의 무게 때문에 혼자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도 잠긴 집안에 갇힌 강아지처럼 남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문에 갇힌 처지가 아닐까.

 

퇴직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 해 대낮에 짖어대던 강아지들은 인생의 전환점에 붕 떠 있던 내게 분수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십수 년째 살고 있어도 공중에 떠 있는 어정쩡함을 느끼며 대낮의 내 집이 낯설던 것과도 화해한 지 오래이다. 그 해 만난 매미는 또한 내게 어느 날 느닷없이 내던져진 존재가 아님을 생각하게 했다. 만나지는 것들과 상황과도 좋은 관계로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남은 욕심이다.

 

이러한 것이 등불 주위를 맴도는 하루살이의 부질없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질없는 것도 포기한다면 내 영혼의 집은 빈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