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것들을 보는 재미

 

 

                                                                                    성기조

미루나무가 듬성듬성 자란 논둑길을 걷고 싶다. 걷다가 구름도 올려다보고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도 두 뺨에 받으며 상큼하고 시원한 감촉에 주저앉아 아직 피어나지 않은 잡풀들의 꽃망울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일, 꽃이 피는 일, 생명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 보고 싶다.

아직 얼음이 다 녹지 않은 3월, 흙은 꺼멓게 속살을 드러내고 겨울을 견뎌 낸 물은 흙 사이로 스며들며 흘러갈 물길을 찾고 있다.

어디로 흘러갈까? 물론 얕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이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대며 흐르는 물 소리가 흙에 부딪쳐 어린 새 새끼의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다. 부리가 여물지 않아서 노오란 빛깔을 띤 새끼 새의 입부리,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옴지락댈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는 귀청을 울릴 만큼 쨍하지도 않다.

바람이 꽃잎을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슬방울이 넓은 연잎에서 구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봄비가 뜨락에 떨어지며 내는 소리처럼 힘이 없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귓속을 간질이며 정답게 파고드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원래 어린 생명을 알리는 목숨의 소리는 부드러울 뿐 힘이 없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자라면서 그 소리는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힘 있고 옹골차게 자라 제자리를 차지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힘이 없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면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이치와 다름없다.

흙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이 있어야 풀이 자라고 나무가 살고 논에 곡식이 무성하게 자란다. 흙만 가지고는 완벽하게 생물이 살아갈 수 없다. 물은 땅과 하늘의 힘을 합쳐 만들어진다. 땅 속에 묻혀 있는 물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 올라간 수증기가 대기의 영향을 받아 비로 내려온다. 비는 물이다.

하늘과 땅이 힘을 합쳐 만들어내는 물이 흙으로 들어가 모든 생물의 어머니가 된다. 생명이 자라는 곳은 어디고 물기가 있어야 한다. 흙가루가 풀풀 날리는 메마른 땅에 아무리 씨를 뿌려도 눈을 틔우지 않는다. 씨가 마르기 전에 비가 내려야 한다. 물이다. 물이 흙 속에 머물며 씨앗의 눈을 틔우게 만들어야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다.

생명은 신비한 것이다. 신비는 우주 만물이 지닌 속성이기 때문에 조물주 이외는 그 비밀을 알 수 없다. 보라, 사람이 태어나는 것, 꽃이 피어나는 것, 새들이 알에서 깨어나는 모든 신비, 모든 비밀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

물론 과학이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는 말하지만, 아직까지 사람의 유전자에 관한 비밀도 알지 못하여 병들어 죽는다. 아직 병을 고칠 만한 약이 없다.

동네 어귀 시냇가에서 송사리와 피라미를 잡을 때 발목을 적시는 물의 촉감을 기억할 것이다. 맑고 깨끗한 물이 잔돌을 굴리며 흘러내릴 때 그 투명한 흐름에 넋을 잃고 두 손 모아 송사리를 잡으려고 호들갑을 떨던 때, 부드러운 흙 속을 뒤지며 땅강아지를 잡으려고 할 때, 하늘 높이 나는 나비들, 새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했는가?

꿈과 추억으로 다가오는 이 작고 하찮은 생명들을 두려움과 공경의 대상으로 삼아 참회하며 평화롭게 공존해야 된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게 아니다. 발전과 개발이란 생각을 앞세워 파괴하고, 인공(人工)의 멋을 내세워 자연을 깡그리 쓸어버린 짧은 생각이 문화란 낱말로 둔갑했다.

제자리에 있어야 될 산이 없어지고, 물길을 찾아 흐르던 시내가 바뀌고, 펀펀한 땅이 언덕빼기로 변하여 큰 돌과 잘려나간 왜소한 정원수가 차지하고 있다. 타국에서 온 이름 모를 꽃들이 신기하다는 생각 때문에 텃밭을 차지한 세상, 이것들이 토착土着의 고달픔 때문에 생기를 잃고 배배 틀려 죽어가고 있다. 숨이 막히고 목이 부어오른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쓰려 모래가 눈 안에 들어간 것만 같다.

물기가 배어 촉촉한 대지(大地), 흙살을 만지며 생명의 신비를 느끼면서 가슴이 아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나밖에 없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우리들이 너무도 빨리 환경을 들쑤시고 부수고 무너뜨리면서도 겁을 먹지 않는다. 모두가 문명이란 말을 앞세우고, 발전이란 단어를 메고 다니며 편리하게 딱지를 붙인다. 발전이 곧 퇴화退化요 문명이 곧 반문명(反文明)이란 사실을 깨닫는 날이 언제 올지 걱정스럽다.

물과 흙, 하늘과 바람, 해와 달이 있어야 모든 생명이 제자리에서 자라간다는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돈과 물건, 편리한 기계들이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든다.

자연이 곧 목숨이란 것을 깨닫자.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역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

시집 『근황』, 『별이 뜬 대낮』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