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紅燈

 

                                                                                          고임순

지난 5월 중순, 중국의 고대문화 유적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아직도 뇌리에 각인된 문물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전혀 외국처럼 느껴지지 않는 중국이 한자문화권의 예술인 서(書)의 본고장이기 때문일까. 어릴 때부터 익혀온 한자로 꾸준히 서예술을 연구하고 있는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임을 자책하면서 가는 곳마다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발견하고 회고적 향수를 느꼈다.

가장 강렬하게 내 호기심을 유발한 곳은 명·청 시대의 전통 촌락인 평요(平遙) 땅이었다. 산서성의 중부에 위치한 이곳은 비옥한 토지가 많은 태원분지의 남단에 있는 무려 28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였다. 이곳의 명물 평요 고성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명되어 으뜸가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 날은 따가운 햇볕이 내려쬐는 섭씨 32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다. 한여름 복장으로 서둘러 고성 앞에 다다른 우리들은 눈앞을 가로막은 약 10미터 높이의 회색 성벽에 압도되었다. 저 견고한 요새 같은 담으로 둘러진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억겁의 비밀이 숨겨진 것 같아 사뭇 궁금했다.

12인승 유람차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푹 패인 시멘트 길을 흔들거리며 좌우를 살펴보았다. 담 밑에서 어린이들이 놀고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간혹 보이는 한가한 변두리 길이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내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건물마다 걸려 있는 홍등이었다. 순간 영화 ‘홍등’을 떠올리자 이곳이 바로 그 영화의 촬영지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었다.

헌청 앞에서 차에서 내린 일행은 입구에 석각 사자상이 이색적인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구헌청, 성황묘, 문묘, 무묘, 재산묘, 길상사 등 공공 건축이 대칭적으로 이어져 있어 눈 돌리기가 바빴다. 먼저 유학박물관에 들어가니 우리의 정신적 고향인 양 친밀감이 일었다.

명륜당의 공자상 위 현판에는 ‘일의관지(一以貫之)’라고 쓴 안진경체 해서가 눈에 띄었다. 또 대성전의 공자와 그 제자들의 화려한 대형 소상벽화(塑像壁畵) 앞에 서 보니 만세 사표로서 중국인들이 추앙한 공자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었다. 공자를 시조로 유교는 중국의 지도이념이자 실천윤리의 근간이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도 인(仁)을 규범으로 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길을 제시한 『논어』를 통하여 공자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바 있다.

다음 공간에는 왼쪽 벽으로 한 칸, 한 칸 연령별 층이 마련되어 있어 이색적이었다. 나는 십유오이지학(十有五而志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등 다섯 칸을 지나 ‘칠십수심(七十隨心)’ 앞에서 옷깃을 여미었다. 내가 언제 여기까지 왔는가. 평생을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끝에 공자는 드디어 나이 70에 이르러서야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 대인격을 이룰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제자들에 둘러싸인 만년의 공자상을 우러르며 나 자신을 돌아보니 몹시 부끄럽다. 뼈아픈 자신의 뉘우침이다. 아련히 내 삶의 끝을 바라보며 이제부터 더 정진할 것을 다짐해 본다.

다음은 과거박물관에 들어갔다. 수·당 시대부터 내려온 문무관을 등용하기 위해 제정된 과거의 시험제도가 상세하게 설명된 것을 읽으며, 우리나라 역사를 상기해 보았다. 고려는 초기에 과거제도를 신설하고 중국 제도를 그대로 도입했음을. 그래서 고려 말기에는 한문학이 눈부신 발전을 해서 서예계도 크게 발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조에 내려와서 과거제도는 더욱 본격화되고, 정치, 문화, 서예술이 명·청나라 영향권에 있었다. 신진학자들이 청나라 사절단으로 건너가 크게 견식을 넓히고 돌아와 선구자가 되었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과 『북학의(北學議)』를 쓴 박제가가 그 대표로 계몽에 앞장섰다. 박제가에 사사했던 김정희도 약관 24세에 중국땅을 밟고 당대의 명필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과 교류하여 서예술의 혁신을 도모하고, 독특한 추사체를 탄생시킨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거리로 나왔다. ‘훈풍남래(薰風南來)’ 유려한 행서 현판이 걸린 문으로 들어가니 양쪽에 상가들이 즐비한 번화가가 나왔다. 이곳은 산서 상인의 발상지로 유명했다. 전국의 금융업을 독점하여 탄생시킨 ‘일승창(日升昌)’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 점 이상의 문화재가 보존된 평요현 박물관을 비롯하여 상회, 표국, 전당, 천길상, 협동 등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어디를 가나 관광객 인파와 마주쳐 함께 휩쓸려 다녔다. 종이 나팔을 입에 대고 외쳐대는 중국인 안내양의 금속성 음성이 귀를 따갑게 했지만, 밉지 않고 흥미진진했다. 노점 상인들이 호객하는데 물건 가격이 제멋대로다. 신발가게에서 편안한 수제 헝겊신을 하나 사 신고 청나라 여인이 된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점심을 먹고 차 한 잔 마시며 잠시 휴식하고 시루(市樓)로 향했다. 이곳은 20미터 높이의 3층 기와지붕으로 성내 중심에 위치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어슷비슷 닳아빠진 돌계단을 ‘갈 지(之)’ 자로 올라가니 2층 지붕 밑에는 앞뒤로 4개씩 아름드리 홍등이 매달려 있지 않은가. 세찬 바람에 땀을 씻으며 눈앞의 홍등을 매만지니 불현듯 영화 ‘홍등’의 비밀을 캐고 싶어 서둘러 민가로 내려갔다.

성내에는 크고 작은 시가가 100여 개, 전통적인 사합원(四合院)`─`가운데 정원이 있는`─`식 민가는 3,797처가 있는데 그 중 400여 처는 명·청 시대의 건물이라 보존가치가 아주 높고, 지역적인 풍모가 독특하다고 한다. 한때 권세를 내휘둘던 유력자의 저택과 노포의 석제 대문 앞은 차 바퀴가 박혀 있어 마차가 빈번히 왕래했던 옛 번성함을 실감케 했다. 뒤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원에는 모란이 지고 잎새만이 무성했다.

중국 특유의 원통 기와지붕에는 벽돌로 조각이 돼 있고, 집 구조는 단순한 것 같은데 복잡했다. 바깥 문에서 안쪽 문으로 들어가 집안을 돌아다녀 보니 미로처럼 되어 있어 어떻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나무 침대와 탁자, 의자가 놓인 네모난 공간들. 응접실, 거실, 부엌 등 어느 구석에서 ‘홍등’의 등장인물들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해진다.

‘커다란 붉은 등을 높이 높이 달아라(大紅燈籠高高掛)’가 원제인 이 영화는 중국의 봉건적 가정을 배경으로 남성에 의해 자행된 여성 학대의 비정함을 표출하고 있다.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여인들의 처절한 복수와 갈등으로 얼룩진 바로 그 집. 홍등이 켜진 삶의 공간과 꺼진 죽음의 공간에 갇혀 오직 생식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4명의 부인들은 스스로 개, 고양이만도 못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마지못해 삶을 이어갔던 것이다.

옥상 위에 항상 자물쇠를 채워뒀다는 죽음의 비밀 방을 감싸 안고 있는 높은 담을 우러른다. 남성의 절대 권력의 상징인 저 담. 동양의 노라는 저렇게 담이 높아서 집을 뛰쳐나갈 수 없었을까. 종국에 셋째 부인은 죽임을 당하고, 이것을 목격한 넷째 부인은 미쳐버린다. 그리고 새로 다섯째 부인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이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일부다처제에서 오는 여인의 한은 어찌 중국뿐이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니 마음 언저리가 아려온다.

3천 년 가까운 역사와 문화가 농축된 평요 고성에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다. 회색 담이 더욱 신비스럽게 가라앉는다. ‘홍등’의 몽환에서 깨어난 나는 일행과 합류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운봉(雲峯) 호텔. 이름은 멋들어지나 시설은 낙후되어 있었다. 저녁식탁에 앉아 이곳 특산물 분주(汾酒)로 피로를 풀었다. 이 마을을 흐르고 있는 분하(汾河)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접대양이 미안한 듯 서둘러 촛불을 켜 주었다. 촛불이 더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저녁식탁. 이보다 더한 운치가 어디 있으랴.

창 밖 길은 한산했다. 저 멀리 둥근 해가 지고 있는 광경이 왜 그리 쓸쓸한지. 햇빛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나는 일어섰다. 하루 종일 두 눈 가득 켜졌던 홍등을 끄고 이제는 휴식할 나의 밤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