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라는 것이

 

                                                                                         유혜자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에서 ‘술은 봄철에는 집 뜰에서 마시고, 여름철에는 교외에서, 가을철에는 배 위에서, 겨울철에는 집안에서 마실 것이며…’ 하는 구절을 보다가 20여 년 전 우이동 골짜기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문우 ㅈ여사가 여름이 가기 전에 저녁을 먹자고 우이동에 초대를 했다. 가슴까지 씻어 내리는 상쾌한 계곡 물, 참나무 정수리에 머물던 석양빛이 사라진 후 산산한 바람에 마음을 풀어놓고 ㅈ여사가 차려놓은 바위 곁으로 식사를 하러갔다. 바삭바삭하게 튀긴 닭다리와 매콤한 파전에 회 무침까지 소주 안주 같은 반찬이라 어리둥절해 하는데, ㅈ여사는 싱글싱글 웃더니 배낭에서 소주를 여러 병이나 꺼내어놓는 것이 아닌가.

일행 넷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곤 맥주 한 잔도 못 마시는 여성들이었다. 소주가 아니라 사이다라면서 ㅈ여사가 권할 때 받아 마신 것이 무릇 몇 잔이었던지. 네 여성은 두려움과 망설임 없이 마구 마셔댔는데도 취하지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얘기에도 신선한 감동이 일고, 유쾌하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계곡 물과 시간을 빨리 흐르게 했다. 산 그리메 퍼지듯 한 사람의 기쁨이 네 사람의 기쁨으로 번지고, 초아흐레 달빛이 산 빛도 살라먹었을 때 이름 없는 축제는 끝났는데 아무도 어지럽거나 휘청거리지 않았다. 골짜기 물에 술을 홀짝홀짝 쏟아 부었단 말인가. 폭음을 했어도 면책을 받은 것처럼 떳떳하기만 했다. 같은 술도 어떤 때는 독주이고 어느 때는 사이다만큼 시원한 것임을 어찌 알았으랴.

그보다 몇 년 전 일이다.“

네가 술이 과하다더라. 어떻게 된 거니?”

직장으로 찾아온 친구가 화난 듯이 물었다. 참한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술이 과하다는 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술이라면 어려서부터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하는 찬송가를 부르며 금기해 왔다.

술의 매력이나 향기보다 예이츠의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네’의 낭만적인 시에 이끌렸고, 어느 매혹적인 이름에도 끌린 적은 있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서 나치의 통치를 피해 파리로 피난온 라비크가 여권도 신분증도 없이 불법 의료행위로 불안한 생활을 하던 중 다리 근처에서 만난 여인과 술집에 가서 주문한 술이 ‘칼바도스’였다. 라비크는 향기로운 칼바도스 잔을 매개로 그 여인과의 사연이 시작된다. 그 매혹적인 이름의 칼바도스는 어떤 술일까 궁금했었다.

그러나 맥주 한 잔도 기피한 내게 술이 과하다는 소문은 억울했다. 기독교 모태 신자라는 이유와 직장에 입사했을 때 “여성 PD 중에 술이 과한 분이 있으니 처음부터 술을 들지 말라”고 충고한 상사가 있어서 잘 따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혐의를 받을 만한 일이 있긴 있었다. 비원(秘苑)으로 갔던 직장 야유회 때 맥주를 많이 갖고 갔는데, 여직원들은 한쪽 구석에서 술잔을 비우기에 급급했다. 술을 권한 사람들이 한눈 팔 때 술을 좋아하는 옆자리 동료가 대신 마셨고, 나중엔 풀밭에 부어버렸는데 우리와 먼 자리에 있던 이는 다 마신 것으로 여겼었나보다.

나는 그때까지도 술 마시고 뒷골목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못 가누는 사람, 흥얼거리거나 소리 지르며 시비를 걸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 사람들을 혐오했다. 그러나 담대해지려고,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술의 힘을 빌어서 잠재된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혹은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바람 빠진 튜브에 바람 넣듯 팽팽해지려고 술을 마시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불면 때문에 고생하면서 밤마다 조금씩 술을 홀짝거린다는 친구를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게 술은 금기 사항이었다. 직장에서 저녁 회식자리에 가면 일부러 문간 가까이 앉았다가 여차하면 도망 나오거나 마냥 새침데기일 수 없어 술잔을 받아놓고 곁사람 몰래 쏟으면서 지냈다. 술자리를 피해서 손해 보는 일도 있었으나 그것을 감수했다. 그러나 우이동 골짜기 일이 있은 뒤엔 부득이한 경우 몇 잔 마셔도 흩어지지 않을 자신감이 서는 것이었다.

분위기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은 해도 우이동에서의 폭음은 지금껏 수수께끼이다. 술은 여름엔 교외에서 마셔야 한다는 임어당의 말처럼, 아니 달빛 아래 술잔을 기울인 이태백처럼 분위기에 취했었던 것인가. 오래 전부터 우러러본 산이어서 우리를 품어 안았을까. 아니면 산의 정기가 몸에 스며서 독한 것을 이겨내게 한 신령스런 자리였던 것 같고, 산 그리메에 정신을 정화시키는 투명한 기가 흐르고 있었던가.

나는 그 후로 술에 대해 가졌던 혐오나 두려움이 없어졌다. 마치 삶의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기분까지 가뿐했다. 눈을 들어 산이 지닌 심오하고 고즈넉한 빛을 바라보면 우리를 감싸줄 것 같았다.

예이츠의 ‘음주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네’나 감시와 추적이 두려운 『개선문』의 라비크가 여인과 함께 향긋한 칼바도스를 시킨 것 또한 멋진 일이다. 냄새가 향긋하여 조금씩 냄새를 맡으며 마신다는 칼바도스. 날이 새면 어둠에서 벗어나며 조금씩 푸르른 품을 열어 보이는 산처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사랑의 분위기도 칼바도스가 이루어줬을 것이다.

“술과 인간은 끊임없이 싸우고, 끊임없이 화해하고 있는 사이좋은 두 투사와 같은 느낌이 든다. 진 쪽이 항상 이긴 쪽을 포옹한다”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항상 이긴 쪽을 원하는 마음이 아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