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

 

                                                                                        최순희

돌아갈 날이 모레로 다가온 11월의 하오였다. 남은 출장 일정을 체크하던 언니가 문득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얘, 나… A씨 한번 찾아볼까?” 아, 그래, A 아저씨가 있었지……. 언니는 어느새 114 안내원에게 A라는 변호사 이름으로 등록된 법률회사 번호를 묻고 있었다. 전화는 그의 비서와, 이어 그와 곧 연결이 되었다. D일보 기자를 거쳐 한때 판사로 그리고 이제 변호사로 일하는 아무개님이 맞는지, 그렇다면 혹시 칠십 몇 년도에 미국으로 떠났던 아무개란 사람을 기억하시는지 등등의 정중한 문답을 지나 “아!”, “오!” 하는 소녀 같은 탄성과 달뜬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출국 전날, 그러니까 바로 그 이튿날로 저녁 약속이 되었다. 데려다만 주고 갈 게 아니라 나도 함께 앉아 차라도 하자고 했다.

언니가 결혼과 함께 처음 미국으로 떠난 것은 70년대 초였다. 십여 년을 살다 한국으로 돌아와 또 십여 년을 살다가 다시 돌아간 것이 4년 전. 직장 일로 잠시 출장을 나오면서, 혹시 시간이 나고 기분이 내킨다면 떠나기 직전 즉흥적으로 한번 수소문해 보리라고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왜 십여 년씩 한국에 사는 동안에는 이런 만남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그 대답은 간명했다. 그때는 아직은 젊었고, 또 지리적인 가까움이 혹여 괜한 오해를 부를세라 오히려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어쩌다 텔레비전에 얼굴이 비칠 때면 ‘아, 판사가 되었구나’ 혹은 ‘아, 지금은 변호사인가 보다’ 하며 근황을 짐작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늘씬한 멋쟁이였던 언니의 이십대는 화려했다. 먼 곳에서 나타난 기사와 결혼하여 돌연 이 땅을 떠났을 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허탈해 한 신사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 가운데 언니 쪽에서도 좋아한 사람은 그러나, 아마 A씨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을 지나 지금껏 애틋하게 남은 이름이니 적어도 몇 년은 사귄 인연인가 했는데, 이번에 처음 물어보니 통틀어 반 년 남짓이 전부였던가 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같은 찻집에서 만났는데, 마지막 만나던 수요일, 평소와는 달리 그가 그럼 토요일에 만나요, 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잊고 안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자존심 상한 처녀는 그에게 물어볼 수도, 당연한 듯 그 찻집에 나가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청년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 처녀의 심중을 이리저리 짚어보다, 당시 자신의 암담한 처지에 모든 탓을 돌리며 그냥 가만 있어버렸던 듯하다.

두어 해가 흘러 바다 건너 떠나기 며칠 전, 처녀는 처음으로 제 쪽에서 연락하여 그를 만났다. 그 날 처녀와 작별한 뒤 청년은 훗날 아내가 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에게 건넨 그의 첫 말이 “오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냈습니다”라는 비장한 대사였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몇 걸음 늦게 들어가 30년만의 재회 장면을 부러 놓쳤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내가 끼어든 것이 의외로 무람없이 여겨졌다. 진회색 정장에 붉은색 타이의 A 아저씨는 젊은 날보다 훨씬 더 말쑥하고 중후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도수 높은 안경알도 조금은 덜 어리어리해 보이고, 그 너머의 눈빛도 내 기억 속의 것보다는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딸만 둘 두었고, 함께 얘기를 많이 나눈다는 그에게, 각각 동갑의 딸을 둔 나는 친근함을 느꼈다. 오래 전, 나도 그를 모두 세 차롄가 보았었다. 두 번째는 그는 해직 기자가 되어 동료들과 광화문 사옥 앞에서 침묵 시위를 하고 있었고, 일 년쯤 지나 세 번째엔 신혼의 아내와 동대문시장 구경을 나왔다가 나와 마주쳤다.

언니가 나를 그에게 처음 소개한 것은 고1 때였다. 신문기자를 꿈꾸는 문학소녀 동생에게 학보사 편집장 출신의 명민한 사회부 기자가 뭔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일러주는 대로 나는 광화문 크라운제과로 혼자 나가 그를 만났다. 수필도 쓰고 기자도 되고 싶다는 열여섯 살짜리에게 그는 그 어리어리한 안경 너머에서 그래, 네가 생각하는 수필이란 어떤 글이냐고 빙긋 웃으며 물었는데, 나는 거기서부터 당황하여 중언부언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차원의 수필이란 현실에서 유리된 채 한낱 등 따시고 배부른 이들의 고상한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그가 미처 뭐라 하기도 전에 비수처럼 아프게 나를 찔렀던 것이다.

이제 나이 먹어 비윗살 좋아진 나는 언니가 궁금해 할 법한 것들을 대신 묻고 있었다. 그땐 어떻게 해서 헤어지게 된 것인지, 아직도 간간이 글을 쓰는지, 이 순간의 기분은 어떤지 등등. 그건…, 당시 아버지는 말기 위암으로 오늘 내일 하셨고, 가난한 집안에 손등에 때가 꼬질꼬질한 동생들이 줄줄이였으니 붙잡을 수가 없었지요. 글? 아, 내가 언제 글을 쓰기도 했던가! 이어 그는 푸시킨이었던가, 젊은 날에 읽은 누군가의 글귀를 떠올렸다. 바닷가 절벽에 밀려온 파도가 오랜 세월을 두고 시간의 무늬를 그리는데, 우리 삶의 문양도 그와 같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나중에 언니는 그런 얘기를 그런 식으로 표현할 줄 아는 그가 마음에 든다고, 그러나 내겐 지나치게 지적이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예전의 그가 훨씬 더 멋있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도 그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평범한 보통남자로 살아가는가 싶은 애석함,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리던 고향이 변해버린 듯한, 더 이상 그리워하고 애틋해 할 대상이 없어져버린 듯한 허전함 같은 것. 그러나 예서 무엇을 더 바라랴. 변두리 호텔 커피숍은 한산했고, 품위 있게 나이 먹어가는 두 중년의 모습은 십여 년쯤 전에 만나졌더라면 남아 있었을지 모를 핑크빛이 거의 탈색되어 내겐 그 담담함이 보기 좋았다.

그들을 거기 남겨두고 나와 이리저리 낙엽이 쓸리는 주차장을 걸어갔다. 11월의 저녁 바람이 코트 깃을 파고들고, 발 밑에선 마른 플라타너스 잎들이 파슥거리며 부서졌다. 막 차에 앉아 시동을 거는데, 예기치 못한 뜨거운 무엇이 목울대로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대로 운전대에 엎드려 나는 조금 울었다.

십여 년 전 한국에 갓 돌아왔을 때, 나도 옛사랑과 한 계절에 한 번쯤 몇 계절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그때 서울까지 다섯 시간이 걸리는 남쪽 끝에 살았는데, 나는 어디 가서 마주 앉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차도 한 잔 대접할 줄 모른 채 내려보내곤 했다. 두 사람이 한 거라곤 예전에 함께 걷던 길을 이제는 차로 되짚어 돌아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이었다. 가요 메들리 테이프를 틀어놓은 채 그는 그 무렵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밀리언셀러 『퇴마록』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느낌이 나를 휩쌌다. 그는 십여 년 세월이 지났어도 너무도 변함없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선량하고, 따뜻하고, 사회적 성공도 제법 거두었으나, 여전히 가요 메들리와 대중 판타지 따위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좋아하면서도 끝내 그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그 무엇인가가 그에게 고스란히, 견고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각자 사랑하는 가족을 집에 놔둔 채 나는 무얼 찾아 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나는 먼 훗날, 한 예순 살쯤 되었을 때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때쯤이면 어디 멋진 찻집에 마주 앉아도 과히 흠이 되지 않고, 가요 메들리나 대중적 판타지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도 얼마쯤은 무디어졌으리라 기대했을까.

그 후 한 몇 년간은 그 무렵의 몇 계절을 간간이 회상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 잘 살고 있으리란 믿음 외에 이제 나는 그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차는 물론 멋진 곳에 마주 앉아 식사도 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해졌는데도 어느 누구와도 굳이 그러고 싶어지질 않는다. 맨 처음 그와 재회했을 때, 귀가 멍멍해지는 이명이 오면서 모든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듯하던 순간의 그 가슴 떨림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저녁, 휘불어가는 낙엽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은 가랑잎처럼 푸슬거리는 삭막한 내 가슴에 대한 애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